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해양대학 발전기금 기증식 때(2007. 12. 5)의 김순갑 총장, 이준수 학장, 박종규, 그 부인(왼쪽부터).뒤줄은 해대 단과대학 학장들
박종규(朴鍾奎)는 1930년 11월 23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서 박윤식과 김정태 사이에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사범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8·15 광복을 맞이했다. 월남하여 서울대 사대부속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여 정치상항이 바뀌어 38선을 넘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가산을 평양에 그대로 남겨두고 월남해야 했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어려워 사대부속중·고등학교를 고학을 하다시피하며 졸업했다. 당시 서울대학에서 커트라인이 높았던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합격했으나 학비조달을 우려해 포기했다. 대신 국비대학인 한국해양대학교를 선택해 기관학과 6기로 입학했다.

그는 1954년 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운공사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기관사로 해상근무를 하다가 1963년에 해운공사 본사 기획실에 발령되어 노정업무를 보좌했다. 그 뒤 총무부 인사과로 옮겨 노정계장 보직을 받아 해상과 육상을 망라한 직원들의 근로조건개선과 복리후생증진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또한 노사화합을 위해 대노동조합 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맹기 해군참모총장이 예편하고서 임광섭 후임으로 1964년 11월 해운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맹기는 경영개선을 위해 대내적으로는 청탁인사를 배격하고 투명인사와 기강확립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화물유치를 위해 대고객 서비스 개선에 주력하면서 항로개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합리적인 경영으로 취임 1년 만에 만성적자이던 해운공사가 흑자로 돌아섰다.

이맹기는 취임직후 박종규를 인사과장으로 발령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민주공화당의 사무당원들을 대량으로 감원했다. 감원된 인원을 국영기업 또는 정부산하단체 등으로 내려보내면서 그들을 우대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다. 많은 국영기업들이 그들을 계장과 과장급으로 발령했다.

해운공사에도 13명이나 배정되었다. 당시 해운공사의 육상직원이 100여명에 불과하여 13명을 계장과 과장으로 발령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사는 형평성과 위계질서가 있어야하는데 그 원칙이 무너지면 기존직원의 강력한 반발과 사기전하가 크게 걱정되었다. 박종규는 고심 끝에 13명을 불러놓고 어려운 회사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인사규정대로 경력을 환산하여 평직원으로 발령하겠다고 통보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음날 공화당 간부가 나타나 "다른 국영기업체는 지시대로 발령하는데 유독 해운공사만 불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주먹을 휘두르며 호통을 쳤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선생님은 이 사람들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인사과장으로서 기존 직원들도 중요합니다. 해운공사 직원이 되겠다면 인사규정에 따라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만 본인들에게도 유익하고 회사에도 도움이 됩니다"라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박종규는 생각다 못해 이른 새벽에 공화당 총무국장 김유탁 의원 댁을 방문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박종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무례함을 무릅쓰고 댁까지 찾아왔습니다. 해운공사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양해를 구하고 회사형편을 세세히 설명드렸다.

김 의원은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더니 "당신 생각이 옳소. 그렇게 하시오"라고 의외의 대답을 했다. 박종규는 머리를 조아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김 의원 댁을 나왔다. 박종규는 김 의원을 존경했고 김 의원 역시 "해운공사 인사과장. 그 사람 대단해"라고 공화당을 출입하는 형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60년 후반은 대부분의 공산품과 화장품 등을 일본에서 수입하던 때라 밀수가 기승을 부렸다. 박종규는 벌칙조항을 강화하는 등 밀수방지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하루는 부산출신 노재필 의원이 그의 동생을 한/일간 정기여객선 아리랑호의 사무차장으로 승선시키라는 인사 청탁을 했다. 사무장은 한 사람이면 족한데 사무차장을 둘 필요 없다고 즉석에서 거절했다. 며칠 후 직속상관인 상무이사가 그 사람을 사무차장으로 발령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상무가 "명령이니 시키는 대로 발령하시오"라고 엄명했다. 그는 물러서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로 사표를 제출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이틀이 지나고서 이맹기가 불러서 회사에 나갔더니 "그만 둘 사람은 상무이사인데 왜 박 과장이 그만둬!"라고 사표를 돌려주며 격려해주었다. 이로 인해 박종규는 이런 분이라면 생명을 걸고서라도 모셔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밖에도 권력자들이 인사 청탁을 많이 했다. 거절할 것은 즉석에서 단호히 거절했고 체면을 세워 주어야할 경우는 설득을 했고 때론 당사자를 불러서 혼쭐을 내거나 인사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인사원칙을 일관되게 지켰더니 인사 청탁이 통하지 않는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오히려 청탁을 하면 불이익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박종규가 철저하게 인사원칙을 고수하다보니 차돌보다 딱딱하다고 '대추씨'란 별명이 붙었다. 인사가 만사라 했다. 이맹기가 해운공사 경영에 성공한 것은 그 배후에는 대추씨가 지극 정성으로 인사행정을 보좌했던 공로도 스며있었을 것이다. 반대급부일까? 이맹기는 박종규를 끝까지 챙겼고, 세상을 떠난 지금도 박종규를 가까이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1968년 한양대학교 김연준이 해운공사를 인수하였다. 이맹기는 민영화된 해운공사를 떠나 1968년 12월 12일 코리아라인을 설립했다. 박종규도 그를 뒤따라 해운공사를 사직하고 코리아라인 설립에 동참했다. 코리아라인은 일본 선원들이 승선을 기피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일본 선박에 한국 선원들을 송출했다. 때마침 1972년에 전일본해원노동조합이 4개월간에 걸친 최대파업을 했다. 세상엔 빛과 그늘이 동시에 있기 마련이다. 장기파업이 일본선주들에겐 큰 타격이었으나 코리아라인에는 기회였고 행운이었다.

일본선주들은 동남아 선원들 중에 가장 자질이 우수하면서도 임금이 싼 한국 선원들을 앞 다투어 선호했다. 한국선원들의 임금이 일본 선원들에 비하면 1/10에 불과했다. 일본 선주들이 한국 선원을 선호해 코리아라인은 단기간에 급성장했다. 최전성기에는 일본선박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 선박 50여척에 1500여명의 송출선원을 관리했다.

코리아라인은 자사선박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해운업을 시작하면서 대한해운으로 회사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대한해운이 부정기 선박회사로는 국내 3위로 성장했다. 사선영업업무가 증폭되자 1977년 4월 1일 계열회사로 코리아마린에이전시를 설립하여 선원관리업무를 독립시켰다. 다시 1980년 2월 11일에는 한국선무로 회사이름을 바꾸어 송출선원을 관리했다. 현재는 대한해운과 미국회사의 선원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박종규는 한국선무의 사장과 회장을 지내면서 실직 선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성심을 다했다. 특히 해군전역장병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해군의 인사적체 해소에도 기여했다. 일자리는 생계수단인 동시에 인간존엄성과 생존가치이라는 신념으로 독버섯처럼 번지는 선원채용 비리를 차단했다.

또한 선원들이 안전한 해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철저한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고급 해기사들의 지도력을 향상시키는 교육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입항하는 선박에 직접 방선하여 선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가장을 멀리 떠나보낸 외로운 선원가족을 위로하는 위안회도 매년 개최했고, 동시에 가정을 방문하여 애로사항을 해결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선원과 그 가족에 대한 그의 애정과 열정이 높이 평가되어 국가는 그에게 대통령표장을 수여했고, 대한해운은 그에게 해성장학회 이사장으로 위촉하여 해운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하고 있다. 

필자가 "이시형 학장님을 한국선무 고문으로 추대하여 작고하실 때까지 돌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시면서도 해양대학교에 발전기금으로 거금 1억 원을 기부하셨지요?"라고 묻자 "부끄럽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대학을 포기하고 해양대학에 입학하여 오늘이 있기까지는 전적으로 모교와 은사의 은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가 행복하게만 보였다. 진정한 행복이란 받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아닐까?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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