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1992. 6. 강동석 해운항만청장이 목포해양대학을 방문했을 때. 왼쪽부터 조창희, 강동석, 이재우 교수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산과 나주, 함평과 무안을 거치면서 황룡강, 지석천, 고막원천 등 지천을 품고서 115km을 흘러온 영산강의 끝자락에서 황해와 만나는 곳에 목포해양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학교는 영산강 강줄기처럼 굽이굽이 돌고 돌아왔다. 1950년 4월 5일 항해과 15명으로 개교하여 1952년 도립 목포상선고등학교로 문교부장관 인가를 받았고, 그 뒤 목포해양고등학교로 문패를 바꾸었다. 1964년 5년제 고등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가 3년제 전문대학을 거쳐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지금은 박사과정의 대학원과 부속시설을 거느린 목포해양대학교이다.

조창희(趙彰熙)는 1961년 7월 목포해양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되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1~2년 근무하다가 다른 직장으로 전직하겠지 하고 시작했지만 39년이란 세월을 학교를 위해 청춘과 인생을 불살랐다. 그는 1934년 9월 6일 전주시 완산동에서 조성만과 김봉남 사이에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나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성격이 거침없이 직설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는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휴전협정 직전인 1953년 4월 군산에 있던 한국해양대학 기관과 9기로 입학했다. 상급생의 모진 훈련과 기합을 견뎌내기 어려웠고, 학교급식 사정이 좋지 않아 배고픔의 고통은 더욱 힘들었다. 1953년 9월 부산 거제리로 학교를 옮기고서도 그 지긋지긋한 고생은 계속되었다. 부산 영도에 신축교사가 준공되었으나 도로와 조경 공사가 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석하는 낙성식이 1955년 11월 25일로 잡혀져 수업은 제쳐두고서 밤낮으로 동원되어 막노동을 해야만 했다.

조창희는 1957년 5월에 졸업하고서 해군장교로 자원 입대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2개월간 지옥훈련을 받고서 해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열악한 군함으로 해상작전훈련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다. 낭만을 모르고 보낸 대학생활 4년과 생명을 담보한 함상복무 3년은 그를 강인한 정신력을 갖도록 단련시켜 주었다.

그는 목포해양고등학교에 부임하고서 6개월만에 3학년 기관과 담임을 맡은 것이 학교일에 관여하는 계기였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학교일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직설적인 성격과 적극적인 행동 때문에 교사들과 학생들과의 갈등을 겪은 경우도 있었지만, 학교일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데서 성취감에 젖어들었다. 옹달샘 물이 졸졸 흘러나오듯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깊어만 가 학교와의 인연을 뗄 수 없게 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관비학생들이라 자질이 우수했으나 대부분 가정이 빈곤했다. 그들은 해기사 면허를 취득하고 선원취업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1년간 승선실습을 해야만 해기사 면허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탈 배가 없었다. 조창희는 정해춘 교장을 모시고 해무청장 보좌관 유덕준을 찾아갔다. 유덕준은 대학선배이며 동시에 해군의 상관이라서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드릴 수 있었다. 유덕준의 배려로 해운공사의 평택호를 인수하고서 선명을 다도호로 변경하여 연습선으로 운항했다. 학생들의 승선실습이 가능케 되었고 선장을 비롯하여 사관 전부를 본교출신으로 발령했다. 다도호는 많은 목포해고 출신이 해운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실습선 확보가 학제를 5년제 고등전문학교로 개편하는 근거가 되었고 목포해양대학교로의 발전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때도 담임을 맡아 "한일회담 찬반은 여러분의 자유이나 동시에 책임이 있음을 명심하라. 특히 여러분은 관비학생이라 준공무원의 신분임을 인식하고서 행동하라. 찬성과 반대 중 어느 것이 훗날 애국인가를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소신 있게 설득하여 학교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무산되었다.

1965년에는 기숙사 사감장을 맡고서는 마치 정원수를 손질하듯이 학생들을 자식처럼 돌봤다. 급식이 충분치 못하여 학생들이 배고파했다. 급식비 내역을 공개하고 부족한 부분을 학생들로부터 보충급식비를 갹출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이를 납부하지 못했다. 의사인 부인이 보충급식비를 대납해주었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내어 아들처럼 뒷바라지했다.

1988년 교수직선제로 학장으로 취임했다. 6 29선언은 민주화가 전국적으로 불붙어 학교에도 파급되었다. 학내기본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학생들의 소요를 대화로써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다. 우선 목포시장의 협조로 상수도 인입선을 끌어와 수돗물 공급이 원활해졌다. 취사실과 화장실을 개조하는 등 생활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그리고 기숙사가 준공되어 1실 8인을 1실 4인으로 조정하고 내부집기도 전부 교체하여 기숙사 환경을 쾌적하게 개선했다. 그러나 제한된 예산으로 학생들의 끊임없는 욕구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다.

1991년 4월, 조창희에게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일생일대의 비극이 찾아왔다. 무단하선을 하였던 실습생을 퇴교시킨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퇴교를 철회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투쟁하고 있었으나 내막은 학생회장을 비롯하여 한민투 소속의 10여명이 주도한 반정부 반체제 투쟁이었다. 좌경교육을 받은 이들은 4월 3일 학생회 출범식에서 학장 조창희 화형식을 시작으로 데모에 불을 붙였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광란의 데모가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교직원대표와 학생대표 간에 몇 차례 대담을 했으나 무한투쟁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학생대표들이 학장과 교수들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는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면서 그들의 유인물에는 "운동장과 유달호에 붉은 깃발을 올리자"라는 주장까지 했다.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어 4월 12일 교수회의에서 교권확립을 결의하고 학생회장을 포함 4명을 제적했다. 학생들은 이에 대응하여 본격적인 반격이 4월 16일 0시를 기해 시작되었다. 교직원 전원과 학군단 요원들이 대치하고 있었으나 학생들의 완력에 밀려 교수들이 학교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조창희는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극한적인 사항으로 치닫자 목포의 유지들과 총동창회 대표들이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의 무지막지한 광란을 목격하고서야 여론이 악화되었다. 들끓는 여론에 학생들의 기세가 꺾인 데다 급식중단으로 데모를 풀고 귀가했다. 한 달 후에 개학하여 교수회는 주모자 5명을 제적했고, 기성회는 파괴한 기물을 학생들이 변상하기로 결의했다. 학생 1인당 3만원 씩 부담하여 약 3천만 원을 모아 서무과가 주관하고 학생대표가 참가하여 유리창 한 장까지 빠짐없이 복원했다. 이렇게 명쾌한 사건처리는 전국대학에서 처음이어서 교육부에서 모범사례로 지칭되었다. 소요사태가 성공적으로 수습된 것은 조창희를 중심으로 전교직원이 일치단결하였기 때문이다.

조창희는 해운항만청과 선주협회, 목포시장과 목포상공회의소의 협조를 얻어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을 추진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1991년 6월 국가정책상 4년제 대학은 불가능하다는 통첩을 받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했다. 인맥을 총동원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1992년 7월 4년제 특수목적대학으로 승격되어 학교숙원이 풀렸다.

최영석 전임학장이 연습선 건조비로 ADB 차관 650만 5000불을 확보했으나 5년이 지나 3500톤 연습선의 건조비가 1500만불로 불어났다. 조창희는 예산확보를 위해 교육부와 협의가 아니라 투쟁을 했다. 악전고투 끝에 OECF차관 295만불과 ADB 보유기금 260만불을 합쳐 1205만 5000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금액으론 응찰자가 없어 수차례 유찰되었다. 불가피하게 일부 시설 장비는 정부예산으로 충당한다는 조건으로 대동조선과 계약이 성사되어 1992년 4월 건조에 착수했던 선박이 새유달호였다.

필자가 "학생들의 소요사태를 극복하는 데는 학장님의 철학이 있었다고 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사건의 결과보다 동기를 중요시 했지요. 고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엄벌했고,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수감된 학생까지도 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열정적이었던 서울의원 이창학 원장에게 "사모님! 학장님을 어떻게 내조하셨지요?"라고 물었더니 "<청춘>의 작가 사무엘 울먼의 '청춘이란 인생의 강인한 의지와 불타는 정열이다'란 글귀에 공감하여 40여년을 그이의 곁에서 지켜보았을 뿐이지요 뭐!"라고 겸손해했다. 

조창희는 학교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동백장 등 수많은 상훈을 수상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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