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1950. 6. 18. 덜레스 미 국무장관(중앙)과 신성모 국방장관(덜레스 오른편) 등 일행이38선 접경에서 북한의 동태를 살피고 있음.
방석훈(方錫勳)은 1930년 5월 13일생으로 함경남도에서 성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 배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군산에 있던 해양대학교 항해과 6기로 입학하고서 곧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해운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국해양대학교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겪었는가를 당시 1학년 새내기 방석훈을 통해 조명해 보았다.

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에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또한 YAK전투기가 서울 시가지를 기총소사를 했다. 항해과 3기로 당시 단양호(LST)에서 승선실습을 했던 이용우(후에 인천항 도선사)는 당시 방석훈 등 후배들에게 "연습선 단양호가 우리 4학년 실습생을 태우고 6월 25일 새벽에 인천항을 출항하여 부산항으로 항행하고 있었는데, 어청도에 이르렀을 때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괴뢰군이 남침했음. 즉시 인천항으로 회항할 것>라는 전보가 날아와 인천으로 회항했었지. 월미도에 닻을 내린 단양호에 권총을 찬 중령이 올라와 이재송 선장께 '즉시 옹진반도로 가서 군인을 후송하시오'라고 서슬이 시퍼렇게 닦달하더라고. 옹진반도에는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팔다리가 달아나거나 머리에 붕대를 감은 부상병들이 운집해있었어.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이었지. 이들을 군산으로 이송한 이재송 선장께서 '우리 연습선 단양호가 군에 징발되어 더 이상 승선실습은 할 수 없소. 고향으로 갈 수 있으면 고향으로 가고, 고향으로 갈 수 없으면 단양호에 있어도 좋소. 그러나 제군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소'라는 비장한 훈시에 우리는 불안하고 앞이 캄캄했지. 단양호는 다시 인천항으로 회항하여 제1도크에 정박하고 있는데 벌써 인민군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어. 다급한 나머지 이재송 선장께서 총알이 난사되는데도 단양호를 도크에서 비상 탈출시켜 남쪽으로 키를 잡아 이곳 군산에 도착했지"라고 무용담을 알려주어 전쟁이 일어났음을 실감했다.

6월 28일 휴교령이 내려져, 귀가가 가능한 학생들은 귀가했으나 오갈 데가 없는 학생 약 110명은 기숙사에 남아있었다. 6월 30일 부산으로 떠나는 단양호에 교수 10여명과 이 기숙사 학생 40여명이 동승했다. 교수들은 떠나고 전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박창훈 학생감은 아침에 학생들을 집합시켜 고향을 향해 부모님께 인사드리라고 하며 전황이 곧 좋아질 것임으로 희망을 잃지 말자고 격려했다.

박창훈은 방석훈, 계익노, 김진형, 김형국을 불러 "너희 네 사람은 밥은 학교식당에서 먹고 학장 댁에서 학장님을 경호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밥은 매끼 학교식당에서 먹고 학장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7월 12일 YMS도 군산부두를 떠난 후에는 박창훈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게 된 이시형은 학장으로 학교를 버리고 떠날 수도 없어 고민과 외로움의 나날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

사모님이 "학생들! 학장님 빨리 피난가시라고 권해봐"라고 부탁했다. 방석훈은 "학장님! 빨리 피난 가셔야 합니다. 인민군이 쳐들어오면 학장님은 고향도 이북이라 납치대상 1호입니다"라고 했으나 학장은 "나는 피난 안가! 안가!"라고 고함을 치며 술만 마셨다. 대전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7월 15일경 기숙사도 폐쇄되었다. 7월 17일 사모님이 목포로 피난 간다면서 방석훈에게 짐 운반을 부탁했다. 손수레에 짐을 싣고나가 군산부두에서 학장 가족이 소형목선으로 떠나는 것을 배웅했다.

교수들은 모두 떠나가고 목자 잃은 양떼처럼 학생들만 을씨년스럽게 남았다. 3학년 이득원이 취사장(炊事長)과 함께 쌀 재고를 확인하고 학생 1인당 쌀 반 가마와 돈 2000원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쌀과 돈이 피난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약 없이 헤어지는 눈물겨운 순간에 이득원은 "지금부터 소수 인원으로 분산하여 호남방향으로 내려가라. 대전은 위험하니까. 검문을 받으면 해군에 입대하기 위해 부산으로 간다고 대답해라"라는 지침을 주었다.

학장이 떠난 뒤 방석훈 등 네 사람도 5000원과 쌀 반 가마를 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항에서 포성소리가 들렸고 이리가 이미 점령되었다는 소문이었다. 하늘에는 제트기 소음이 요란했다. 그들은 옥구면을 지나서 만경강을 건너 최춘호 교수 댁에서 일박했다. 다음날 걷기도 하고 트럭을 타기도 하며 정읍에 도착해 폐가에서 밥을 해먹고 하루 밤을 잤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서 목포에 도착했다.

역전 광장에는 인산인해였는데 천우신조로 '학생'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되돌아보니 학장 사모님이었다. "YMS가 부두에 있으니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YMS가 단양호에 접안하고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이제는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목포부두에서 총성이 나자 달려가는 사람, 골목에 몸을 숨기는 사람,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YMS에서도 발전기가 고장 나 단양호로부터 충전을 받고 있던 Jumper Cable을 도끼로 빨리 자르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며 야단법석이었다. 발전기 수리를 못한 채 항해등과 실내등도 없이 야간항해를 했다. 기름에 웨즈를 담가 불을 붙여 흔들며 목포수도와 진도수도를 통과해야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7월 12일 YMS가 군산부두를 떠나 군산외항에서 5일간 정박하고 있었다. 학장이 소형목선을 타고 나와 군산외항에서 YMS로 바꾸어 타고 목포로 갔다. YMS에는 선장 허동식과 기관장 강경욱, 교수 3명과 학생감 박창훈 그리고 4기와 5기 학생 7명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통신장과 갑판장, 보통선원들도 있었다. YMS에는 쌀 3백 가마를 확보하고 있어 기숙사에 남아 있는 학생 65명도 먹일 수 있는 식량이었다. YMS가 군산부두에 접안하여 기숙사에 남아있는 학생들을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군산외항에서 학장가족만 싣고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YMS가 7월 24일 부산 조선공사 안벽에 접안했다. 먹을 것과 잠자리가 없어 배회하는 젊은이들을 닥치는 대로 강제입대 시키는 사항에서 YMS는 학생들에게 요람이고 안식처였다. 오갈 데 없는 90여명의 학생들에게 매일 숙식을 제공했던 YMS가 해양대학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4기생 이득원은 이전에 근무했던 교통부를 찾아갔다. 교통부 후생과 직원 이학주가 서울에서 쌀 등 후생물자를 몽땅 싣고 왔다고 했다. 이득원은 황부길 해운국장을 찾아가 학생들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했다. 황부길은 합숙소를 마련하고 식량과 주방집기 일체를 지원해 주라고 이학주에게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해운대 초등학교로 합숙소를 옮겼다. 합숙소에 기거하며 미군 수송선에서 탄약을 나르는 노동을 하여 용돈을 벌어 피난생활을 했다.

어느 날 헌병 대위가 합숙소에 나타나 "너희들 정체가 무엇이냐"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해양대학 학생인데 해군 단체입대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돌아갔다. 며칠 후 다시 나타나 "해군에 입대하지 않으면 육군에 강제입대 시키겠다"며 최후통첩을 했다.

이득원은 헌병감 김태숙을 찾아가 단체입대를 부탁해서 성사되었다. 이시형 학장이 9월 20일 입대 환송식을 베푼 자리에서 "너희들은 해대의 뿌리이다. 전황이 좋아지면 즉시 복교키로 했으니 그때까지 건강해야한다"라고 격려했다. 9월 21일 해병대 신병 18기로 입대하여 1개월 훈련을 받고서 해군에 편입되어 다시 2개월 훈련을 받고 실무에 배속되었다. 훈련기간을 포함 11개월만인 1951년 8월 27일에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4기생 백원길과 황보대선은 1·4후퇴 때 재경학생들을 인솔하고 군산에 내려와 호남 학생들에게 연락을 하여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재개했다. 학생들 스스로가 학교를 재개하는 자립심과 애교심이 풍전등화의 해양대학을 존속시켰다.

방석훈은 "6·25전쟁 중에 3학년이었던 4기생 선배님들은 교수들이 다 떠나간 학교를 끝까지 지켰어요. 학생들이 피난길을 떠날 때 쌀과 돈을 나누어 주었고, 부산 해운대에 합숙소를 마련하고 식량과 주방기구를 공급해 주었지요. 해군에 단체입대도 주선하였고, 전쟁으로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재개했어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대학 3학년 학생들이 위업을 해내었지요"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방석훈은 근해상선과 풍국해운에서 신조감독을 하며 선박건조에 대한 남다른 경력을 쌓았다. 1970년 7월 8일 범양상선에 입사해 해무감독 등의 직무를 맡아 1987년 4월 24일 퇴임할 때까지 17년간 선원과 선박관리에 헌신했다. 1980년 1월 1일 전무이사로 승진하여 해운산업합리화의 어려운 과정에서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범양상선의 발전만을 염원했다. 한국 해운사에 찬란했던 범양상선이 간판을 내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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