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범양상선 해륙직원에 대한 연수교육을 할때의 윤희대(중앙).
윤희대(尹熙大)를 통해 암울했던 사회와 해운계의 단면을 조명해 보았다. 그는 1935년 3월 24일 경남 함안군 함안읍에서 윤두수와 이춘 사이에 4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닮아 명석했고 성격이 올곧았다. 부친은 수재들이 다녔던 대구사법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었으나 일제의 악랄한 수탈과 황국신민교육이 못마땅하여 사직했다. 해방이 되고서 중학교 교사로 복직하여 평생을 봉직했다.

윤희대는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했던 1942년에 경남 양산 원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태평양전쟁 막판에 총동원령이 내려져 여린 고사리 손으로 소나무 관솔을 따는데 내몰렸다. 해방이 되고서 1948년에 부산중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기간에 양민이 학살되던 참혹함을 보았고, 경찰과 빨치산간에 사생결단의 공방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도 보았다. 지금도 그 참상이 환영과 환청으로 되살아난다고 했다.

그는 1954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과 10기로 입학했다. 교사인 부친의 박봉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대학의 자유와 낭만을 향유해 보지 못하고 모진 훈련과 기합으로 점철된 캠퍼스생활을 마쳤다. 실습할 배가 없을 때, 다행히 필리핀 마닐라에 본사를 둔 미국계 Everett Steamship의 Bradeverett호에서 승선실습을 했다.

그 배는 요코하마에서 홍콩ㅡ싱가포르ㅡ랭군을 경유하여 카르카타까지 운항하던 4000톤급의 정기화물선이었다. 사관들은 필리핀인이었고 부원들은 중국인이었다. 실습생들은 식사는 사관식당에서 했지만, 힘겨운 작업은 부원들과 함께 했다. 실습을 시켜준다는 명분으로 수당 한푼주지 않는 노동착취였다. 한 달쯤 지나 랭군에서 금괴밀수가 발각되어 중국 부원들이 전원 하선하고 필리핀인으로 교체되었다. 이들은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어 섬뜩했다.

윤희대는 "필리핀 선원들은 한국선원들과는 딴 판이었어요. 그들은 단 1초도 틀리지 않게 8시간 작업을 정확하게 했어요.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황천항해 때나 정박 중에도 작업을 쉬지 않았어요. 옛날 선박에는 시종(時鐘)과 더불어 작업이 시작되었고, 시종과 더불어 작업이 끝났다고 했는데 필리핀인들이 바로 그렇게 했어요. 그들의 철저한 책임감과 질서의식이 나의 인생에 두고두고 교훈이 되었지요"라고 실습 때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한국전쟁 때 필리핀의 UN군 참전을 자랑하면서, 부산에서 소매치기 당했던 일을 들추어가며 필리핀이 한국보다 우월함을 은근히 과시했어요. 사실 필리핀은 그 당시 한국보다 아주 잘 살았지요. 정확한 비교인지 모르겠으나 당시 필리핀 3항사의 월급이 180불이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에 우리 송출선원 3항사가 90불을 받았으니까 필리핀의 국민소득이 월등했었지요.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들보다 몇 배나 국민소득이 높아졌으니 지도자를 잘 못 만난 그들의 비애가 얼마나 크겠어요?"라고 박정희와 마르코스 두 대통령을 비교하는 듯 한 설명을 했다.

윤희대는 1958년에 대학을 졸업했으나 탈 배가 없어 실업자가 되었다. 취업 겸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 해대 졸업생 69명이 해군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서해에서 조기잡이 어선들을 보호하는 작전을 하다가 연평도 근해에서 5·16 군사혁명 뉴스를 들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4·19 학생혁명으로 국가적 혼란이 극심하여 좌절하던 젊은 군인들은 혁명뉴스를 듣고 환호했다.

1962년 8월에 4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그는 실업자 신세를 면하기 위해 해양경찰의 승선경력자 모집에 응모했다. 기초교육을 받고 군산해양경찰대에 경비담당 주임으로 근무하다가 해운공사 공개경쟁시험에 합격했다. 부산/뉴욕 정기항로에 취항하는 남해호에 2항사로 승선했다. 5·16 혁명정부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영향이 해운공사에도 파급되어 선박들을 도입하게 되어 선원수요가 늘어나 취업이 가능했다.

육상으로 올라와 해운공사 부산지점에서 자재업무를 보다가 China Union Line의 Neptune호의 1항사로 선원송출을 나갔다. 그때는 선원송출회사가 없어 해기사협회가 수속을 대행했다. 그런데 선원은 선편이나 항공편을 막론하고 선원수첩으로 여행이 가능했는데 유독 한국만이 여권으로 출입국이 가능했다. 당시에 여권을 발급 받으려면 신원조회와 보안교육 등으로 근 1개월이 소요되어 선원송출에 장애가 되었다. 그 뒤 해운공사 박종규(후에 KSS창업)가 법무부와 교통부를 설득하여 선원수첩으로 입출국이 가능케 되었다.

초창기엔 선원송출계약이 2년이었다. 2년을 계속 승선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외국선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한국선원이 더 많이 송출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서로를 격려하며 참았다. 또한 외화를 벌어들여 국제수지를 개선하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그래서 계약기간을 채우려고 참고 견디느라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2년 계약기간을 채운 선원은 1/3에 불과했다. 중도하선 사유는 과음을 하여 주정을 부리고, 흉기로 타인을 상해를 입혀서 였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가족과 멀리 떠나 망망대해에서 2년간 땅 냄새와 분 냄새를 맡지 못 하고 철판 위에서 중노동과 스트레스를 참고 견딘다는 것은 고문이고 감옥살이였다. 처절한 애환과 외로움을 술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과음으로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Neptune호에서 내려 한국해양대학교 손태현 학장의 부름을 받았다. 연습선 반도호 교관들이 박봉을 견딜 수 없어 송출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학장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모교에 보은(報恩)한다는 마음으로 봉사하다가 해운회사로 돌아갔다. 해운인으로 뜻을 펴보자 노력했으나 경영진의 반목으로 회사가 도산되어 Sanko Line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Sanko에서 돌아온 윤희대는 1971년에 범양상선 선장으로 취업했다. 그 다음 해, 해사부장 장태묵이 동경주재원으로 발령되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범양상선에서 인생의 황금기 정열을 불태웠다. 범양상선은 5만 톤급 원유선 4척으로 시작해서 내항 유조선까지 운항하는 유조선 전용회사로 발돋움했다. 32만 톤급의 초대형 원유선과 매년 4~5척의 원목선 등을 도입하여 국내 최대 선박회사로 우뚝 섰다.

단기간에 선대가 급증하여 선박운항관리가 System화되지 못하고 일선 선장들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윤희대는 해사본부장 방석훈과 부산지점장 오세일과 협의하여 'Master's Manual' 즉 '선장근무지침서'를 제정하여 체계적인 선원선박관리를 했다. 항로결정권 역시 선장의 고유권한으로 관행화돼 왔다. 선장의 기량에 따라 태평양횡단 소요일수가 거의 두 배나 차이가 나서 운항수익도 큰 차이가 발생했다. 북태평양 북극기단의 확장과 수축을 예견하여 Ocean Route가 항로를 추천했다. 겨울철에도 아류산열도 북쪽을 경유하는 대권항로를 선택하여 최단 시일에 항해를 성취할 수 있음에도 선장의 자존심이 이를 거부했다. 도리 없이 Ocean Route의 추천항로로 항행하도록 제도화했다.

그리고 대명선원들에게 연수교육을 실시하여 해상안전은 물론 해·륙 직원 간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했다. 선원가족위안회를 개최하여 회사와 가족들 간에 신뢰와 일체감이 조성되도록 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행하게 된 제도라서 거부도 있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차차 효과가 나타났다.

범양상선의 발전을 위해 전 직원들이 온 몸을 바치고 있는 동안 최고경영진의 판단착오와 경영권다툼으로 회사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해운시황이 악화일로에 있었는데도 80년 초 벌크선박 수척을 저선가로 도입했다. 벌크운임이 폭등해 약 2년간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최고경영진은 "드디어 고운임/고선가 시대에 진입했다"고 기염을 토하며 번 돈을 몽땅 Down Pay해가며 중고선박을 도입했다. 때마침 해운당국의 600만톤 확보정책에 고무되어 한국선주들은 경쟁적으로 중고선박을 도입하여 선가를 폭등시켰다. 500만 불이었던 Panamax를 2000만 불에 사들였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만에 벌크선 운임이 급락하자 범양상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사들이 도산 위기로 내몰렸다.

세계경제호황으로 벌크선 운임이 상승한 것이 아니고 철광석과 석탄의 적출항에서 파업으로 선박들이 발이 묶여 운임이 상승했는데도 한국선주들은 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선박을 도입하고 만 것이다. 영국과 노르웨이 등 전통해운국가는 이때다 하고 중고선박을 내다 팔았다. 결국 범양상선은 극열한 경영권 분쟁으로 회장의 투신자살과 사장의 감옥행이란 비운을 맞고 법정관리로 들어갔다.

필자가 "신명을 바쳤던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져 통절하셨지요?"라고 묻자 윤희대는 "후배들이 20년간 피나게 노력하여 법정관리에서 벗어나고, STX에 M&A되어 다시 살아난 것이 반가웠고 'Pan Ocean'이란 이름이 존속되어 더욱 다행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젊은 날의 열정이 새롭게 열매 맺기를 염원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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