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구강회(오른쪽)와 최학영 인천항도선사(1999. 4. 13 해양대 동기생 고희연에서)
구강회(具江會)는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산해사국 선박검사관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1929년 1월 21일 충남 보령군 청라면에서 구영서와 성갑례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군산국민학교와 군산중학교(6년제)를 졸업하고 1948년 9월 1일에 군산에 있던 해양대학교 기관과 4기로 입학했다.

필자가 해양대학교 입학동기를 물었더니 그는 "해방 후 먹고 살기가 힘든데다가 국비생이라 전국에서 수재들이 모여들었지. 졸업하면 마도로스로 외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당시에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 군산중학교에서도 여럿이 지원했는데 나와 조선과 송광섭 두 사람이 합격했었지. 항해과, 기관과, 조선과 3개과를 합해 90명이 합격했는데 졸업은 54명밖에 못했어"라고 옛날을 회상했다.

구강회가 3학년일 때, 6·25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7월 19일 인민군이 군산을 점령했다. 그는 보령으로 피난을 갔다가 9월 하순에 수복되어 학교로 돌아왔으나 폭격으로 교사가 파괴되어 군산공회당에서 개학식을 했다. 폭격을 피한 기숙사를 개조하여 2층은 기숙사, 아래층은 교실로 사용했다. 해운공사 선박에 분산되어 승선실습을 마치고 1952년 6월 16일에 졸업했다.

정부가 환도 전이라 4기생들이 군산에서 단체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교통부 해운국이 시행하는 선박검사관 공개경쟁시험을 3기생들과 함께 치렀다. 3기엔 손근배, 장여옥, 최병수, 4기엔 강석천, 구강회, 김광소, 김태린, 라영수, 민병익, 박상훈, 송재봉, 조희동 등 15명이 합격해 1952년 8월 20일 선박검사관으로 발령됐다.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창하며 조선인을 관료로 임용한다고 했으나 허울뿐이었다. 특히 전문기술관료인 선박검사관은 일본 고등상선학교와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출신의 일본인만 임용했다. 조선공학과 교과과정에는 함정건조기술을 가르치는 조함과목(造艦科目)이 있었다. 함정건조는 기밀유지 때문인지 조선공학과에는 조선인이 아예 얼씬도 못했다.

일제말기에 부산부두국에 일본인 선박검사관이 있었으나 해방이 되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 선박검사는 공백상태가 됐다. 미군정법령에 의해 설치된 운수부 해상운수국에 진해고등해원양성소 출신의 김원탁, 이긍섭(이상 갑판부), 김흥완, 김동환(이상 기관부) 4명이 최초의 한국인 선박검사관이었다.

해양대학교 졸업생이 배출되어 1기에 이원옥, 이관용 등, 2기에 강필성, 김동협, 나재신, 배영훈, 이성수, 이영준, 이종성, 조순경 등 상당 숫자가 검사관으로 특채되었다. 선박검사관은 고도의 전문지식과 경험이 있어야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선박수리 시설과 자재도 없었고, 선주의 자금사정은 더욱 좋지 못해 선박검사는 형식에 불과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충돌, 침몰, 기관고장, 화재 등 다양한 해난사고가 빈발했다. 많은 어선과 화물선 사고는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949년 10월 5일 인천항에서 발생한 여객선 평해호 사고에 이어 9건의 여객선 사고로 인해 870명이 사망했다. 풍부한 인적자원이 있음에도 일부 지방해사국에만  검사관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대형인명사고가 빈발한다고 여론이 빗발쳤다. 초대 해운국장 황부길은 모든 지방해사국에 검사관을 배치하기 위해 해양대학 3기와 4기 졸업생 15명을 공채했다.

구강회는 1952년 8월 20일 선박검사관으로 발령되어 군산을 시작으로 인천, 묵호, 마산, 통영, 포항, 목포 등 지방을 12년간을 전전했다. 성격이 우직하여 인사 청탁 한 번해 보지 못해 모두들 희망하는 부산 근무는 못해봤다. 선박이라야 겨우 100톤 미만의 목선이 대부분이었다. 60년대 초반까지 여객선 신조를 못하고 화물선이나 어선을 개조하여 여객선으로 운항했다. 60년대 중반까지 디젤엔진은 거의 없었고 소형선박에 야키다마(Hot Bulb)엔진을 거치했었다. 구명동의나 구명뗏목도 제작되지 않아 선박검사를 할 때 다른 배의 구명설비를 빌려다 눈가림을 하는 실정이었다.

그는 12년 만인 1964년에 사무관이 되었다. 인천해운국 항무계장으로 발령되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정다운 항만행정을 해봤다. 그 후 아프리카 아비잔에서 원양어선을 검사했다. 돌아와 교통부 해운국에서 안전계장, 항로표지계장, 검사계장 등 인기 없는 자리를 맴돌았다. 공화당 정부가 공무원에 대한 사정할 때마다 칼날의 방향이 선박검사였다. 검사를 하고서 푼돈 몇 푼을 받았다고 검사관들이 곤욕으로 치르기도 하고 옷을 벗기도 했다.

구강회는 올곧은 성격에다가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어 1975년에 23년간의 공무원 인생을 접고 송출선원으로 변신했다. 필자가 "좀 더 버티어 보시지 그랬어요?"라고 물었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지. 장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현재의 역경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데 앞날이 캄캄했어요. 해운업자가 봉투를 주었다면 그 속에 쥐약이 있었더라도 받아먹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었으니까. 공무원 봉급으론 가족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고, 더욱이 아버지로서 1남 3여의 자식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지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이어 "1975년에 사무관인 나의 월급이 7만 3000원이었는데 수출선박 기관장의 월급은 그 일곱 배가 넘는 52만원이었지요. 그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밥은 먹을 수 있었겠지만 자식들 대학교육을 시키지 못했을 거야"라고 독백을 했다.

"처음 탄 배가 미쓰이 OSK의 아주 낡은 노후선박이었지요. 황천항해를 할 때면 파도가 마치 커다란 도끼로 외판을 내려찍는 것 같았어요. 선체가 당장 두 동강이로 쪼개질 것 같은 죽음의 절정에 다다르면 뱃멀미할 겨를도 없이 선원들의 얼굴이 백지장 같이 하얗게 질렸어요"라고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구강회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 일 때 이란으로 갔다. 페르시안 걸프를 깊숙이 들어가 전쟁으로 많은 선박들이 침몰되어 있는 Shatt al-Arab 수로를 항행했다. 입항 때는 멋모르고 항행하다가 수로 양안에 이란과 이라크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서 일촉즉발의 위험한 사항을 목격했다. 겁을 잔득 집어먹고 선장과 선원들이 출항 때는 승선을 기피했다. 그러나 기관장 구강회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파이로트와 1항사와 함께 수로를 빠져나와 밖에서 선장과 선원들을 태우고 귀항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송출선원 12년간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나들었다.

필자가 "공무원을 하실 때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해운항만청이 발족되기 1년 전 1975년에 공무원을 그만두었는데, 그 때까지 해사국과 해무청, 그리고 교통부 해운국을 거쳐 왔는데 해운세력이 아주 미약했었지요. 5·16혁명 때 1700여 척에 34만여 톤이 전부였는데 대부분이 어선이었고…. 100톤 이상은 67척에 불과했었고, 외항이 가능한 500톤 이상은 50척도 안 되었어요"라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를 상기시켰다.

그는 이어 "1945년 해방이 되고서 15년이 지났는데도 5·16혁명 때까지 해사관련 법령은 일본법령을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었어요. 군정법령이나 대한민국 헌법에도 일제의 악랄한 약탈법령이 아니면 소위 '의용법령'이라고 하여 일제법령을 그대로 사용토록 했었지요. 최고회의가 해사법령을 대한민국 법령으로 제정했어요. 선박관련법령 제정은 해운국 이종성 선박계장(해대 2기)이 주관했으니까 그분의 공적을 인정해야지요"라고 말했다.

필자가 "KR이 장족의 발전을 해서 현재 입급선이 2300여 척에 3000만 톤을 돌파했는데 그 때는 어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격세지감이군요. KR이 설립된 1960년에는 해운공사와 극동해운의 선박 20여척이 Lloyd's와 ABS, 그리고 DnV에 입급하고 있었어요.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외항선박들이 도입되면서 KR 이사장 허동식이 KR 입급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선주들이 입급을 회피했어요. 부산해운국 선박과장 이성수(해대 2기)는 KR의 육성을 위해 선박검사관들을 독려해서 많은 선박들을 KR에 입급시켰어요. 당시 정부가 SOLAS협약의 안전검사를 하고 있던 때라서 선박검사관들이 기존의 선진선급을 유지하면서 Dual Class로 KR에 입급을 강제하다시피 했지요"라고 초창기에 KR성장배경을 말했다.

구강회는 어언간 80 고령이 되었다. 비장한 각오로 공무원인생을 접고서 송출선원으로 변신할 때가 마흔 일곱이었다. 그 때 첫째가 여고 2학년이었다. 지금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출가시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외아들은 미국 올레건 주립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서 미연방준비은행(FRB)에 근무하고 있다. 이를 두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 건가?

◇취재지원 : 창명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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