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이대우 회장이 의자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모습.
이대우(李大雨)는 풍국해운의 계획조선 선정을 위해 명운을 걸었고 동서해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열사의 땅으로 돌진했었다. 그는 1934년 3월 18일 울산 하상면 병영에서 이재곤과 송묘연 사이에 1녀 4남 중 둘째로 태어나 병영국민학교와 울산농고(현 울산공고)를 졸업했다.

그는 1953년 군산에 있던 해양대학 기관과 9기로 입학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학교 본관은 날아가 버렸다. 기숙사를 개조하여 아래층에는 교실로, 위층은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어 학교가 몰골이 아니었다. 그해 9월에 부산 거제리로 이사해 가교사에서 수업을 하다가 부산영도 동삼동 신축교사로 옮겼다.

이대우는 1957년 5월에 졸업을 하고서 김성택의 풍곡탄광의 공무기사로 입사했다. 김성택은 일본에서 문염기술을 배워 조선방직에서 옷감에 무늬염색을 했다. 그는 9·18 수복 때 국제시장에 포목점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이어 경북 봉화군 풍곡리에 소재하는 풍곡탄광과 석탄채굴 계약을 했다. 말하자면 광주(鑛主)인 정부와 계약을 체결하여 석탄을 채굴하는 덕대탄광이었다. 풍곡탄광은 깊은 산속에 위치하여 도로가 없어 채굴이 불가능했다. 김성택은 능란한 수완으로 김현철 재무장관을 설득하여 융자를 받고, 이응준 공병감의 협조로 도로를 건설했다. 갱도에 들어가지 않고도 지표에서 석탄을 노다지로 채탄해서 단박에 재력가가 되어 제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성택은 이대우를 자기 비서관으로 채용했다. 국회의원 비서관 2년 경력에서 얻은 정치력과 설득력이 훗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대우는 동기생 김우경(후에 인천항 도선사)의 소개로 알게 된 박현규와 1964년 4월에 풍국해운을 설립했다. 풍국해운은 처음에 해양대학 연습선 반도호의 대리점이었다. 풍국해운은 본격적으로 해운업을 하기 위해 선박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계획조선을 따내기로 하고 이대우가 그 첨병이 되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을 공략하면 계획조선을 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락의 수행비서인 이장우의 도움을 받아 용산우체국 뒤에 있는 이후락 자택을 방문했다. 새벽부터 정치인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후락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에 올라 출근해버렸다. 이대우가 수차례 방문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락의 출근동선을 알아내어 후암동 병무청 앞에서 승용차를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이후락이 탄 승용차 콧등에다 들어댔다. 혼비백산된 이후락을 밀치고 동승했다. 울산농고 선배란 연고만을 갖고 당대의 절대세도가에게 돌진하는 무모함을 보였다. 청와대에 도착할 때까지 짧은 시간에 계획조선이 선정되도록 협조해 달라고 간청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계획조선은 10%만 선주가 부담하면 35%는 정부무상보조, 55%는 대일청구권자금의 장기저리융자라서 선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이권화 되었다. 정적들이 이후락의 비행을 뒷조사한 이후락 비행 10건에는 풍국해운의 계획조선도 포함되어 있어 이후락의 협조를 받을 수 없다고 포기했다. 계획조선 경쟁자였던 조양상선은 박모 상무를 내세워 계획조선을 따냈다. 박모는 고위층이었던 외삼촌의 협조를 받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이대우는 포기하지 않고 반도호텔로 정구영 공화당총재를 찾아갔다. 풍곡탄광이 소송에 휘말렸을 때 정구영 변호사가 소송을 대리해준 인연이 있었다. 정구영은 평생을 강직하고 청빈하게 살아와 변변한 주택 한 채도 가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구영 공화당총재가 품위유지와 직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반도호텔에 집무실 겸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정구영을 찾아간 이대우는 그간 이후락과의 접촉사실을 설명하고 계획조선이 성사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다.

정구영은 전후 사정을 진지하게 경청하고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겠다고 했다. 그 후 대통령의 명에 따라 이후락이 담당 부처에 지시해 호남정유의 내항유조선 600G/T와 풍국해운 2600G/T의 보리수호가 제3차 계획조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풍곡탄광 김성택이 부도를 맞아 자기자금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부득이 풍국해운은 고려해운에 흡수 합병되어야만 했다. 박현규는 보리수호를 업고 고려해운으로 들어가 지분을 가진 전무이사로 취임했다.

보리수호 신조감독을 했던 방석훈이 보리수호 첫 항해의 선장이 되어 일본 고베에 입항했다. 이대우도 보리수호에 승선하고 있었는데 동서해운 사장 양재원이 이대우를 찾아왔다. 양재원은 원목선 동방호와 동광호 2척을 고려해운에 위탁하여 운항하고 있을 때였다.

양재원은 이대우에게 동서해운 영업담당 서울소장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양재원의 제안에 대해 전제조건으로 첫째 영업에 간섭을 하지 말 것. 둘째 업무추진비의 용처를 6개월간 묻지 말 것. 셋째 회사를 위해 최선을 하겠으니 신뢰를 해줄 것 등을 제시하여 양재원이 이를 수락해 1970년 11월 동서해운에 입사했다.

동서해운은 원목수입상사 동아기업과 장기계약을 맺고 동남아로부터 원목을 수송하고 있었다. 입항은 원목수송이었으나 출항은 언제나 공선이었다. 이대우는 절반의 공선으론 경영을 정상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출항화물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정기항로를 개설키로 했다.

당시 동남아정기항로에는 해운공사의 샤무라인(한국/태국)이 고작이었다.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방콕 등지에 대리점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동남아정기항로 영업을 시작했다. Inbound와 Outbound 모두 성공적으로 집하가 되어 2척으로 시작한 동서해운이 12척으로 번창하여 'D Flag'가 동남아항로를 누비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Oil Shock로 동서해운의 선박들이 계선의 위기를 맞았다. 이대우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신원개발과 중동행 화물의 수송계약을 체결했다. 계약화물은 이란 반달아바스항의 부두건설자재로 3척 분량인 1만 6000톤이었다. 척당 130만 불이라 괜찮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중동항만이 극심한 체선을 앓고 있는 실정을 파악한 직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중동항만에 350여척이 외항에 대기하고 있어 최대 7개월까지 체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원들이 섭씨 50도 이상의 살인적인 무더위를 장기간 버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앞이 캄캄했다. 계약을 이행할 수도 없고, 계약을 파기하자니 페널티가 만만치 않고…. 진퇴양난이었다.

그는 당시 이란항만에 정기선을 배선하고 있던 K-Line의 소개장을 받을 요량으로 동경에 갔으나 실패했다. 되돌아 올 수 없어 영국 인치케트 그룹의 극동담당 애치선을 찾아가 소개장을 받아들고서 열사의 땅 이란으로 날아갔다. 이란에서 스웨덴인이 경영하는 NYK의 선박대리점과 하역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쌀과 설탕은 우선화물로 분류되어 긴급하역이 가능했으나 부두건설자재는 우선화물이 아니라 장기간 체선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우는 대리점 사장과 함께 반달아바스 항만청장을 찾아가 "항만시설 부족으로 막대한 체선료를 지불하여 이란의 국부가 유출되고 있습니다. 시급히 부두를 건설하려면 부두건설자재를 우선화물로 분류되어야 합니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항만청장은 그 권한은 중앙정부 소관이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대우는 "비용은 얼마든지 지원할 터이니 중앙정부를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항만청장이 중앙정부로 출장하여 부두건설자재를 우선화물로 지정을 받아왔다.

동서해운은 이로 인해 150만불 적자가 70만불 흑자로 전환되었다. 그 공로로 1977년 7월 이대우는 전무로 승진했다. 위기를 빠져나온 동서해운이 번창일로로 치닫게 되어 양재원은 한국의 오나시스가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월드와이드 서비스를 계획했다. 극동/미주 항로에 선박 5척을 투입하려면 초창기에 매년 500만 불의 적자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대우는 동서해운이 이를 감당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극구 말렸다. 양재원은 주위에 자문을 받았던 바 '이대우가 해운을 몰라 그런다'라는 대답이었다. 해운공사와 코리아케미컬에 근무하던 양민을 영업전무로 발탁하여 극동/미주 서비스를 강행했다. 동서해운은 이대우의 예측대로 극동/미주 항로에서 실패하고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바쳤던 'D Flag'가 내려져 안타깝겠습니다"라는 필자의 말에 그는 "최고경영자의 판단착오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교훈이었지요. 그 튼튼했던 동서해운이 사양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븐마운틴에 인수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절통한 심정이었지요"라고 대답했다.

이대우는 1982년 6월에 동서해운을 사임하고서 말레이시아 국영선사를 비롯하여 독일, 대만, 일본 호주 등의 한국총대리점인 동신선박을 설립하여 활발한 활동했었다.

◇취재지원 : 창명해운㈜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