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편집위원 耕海 金鍾吉

▲ 김길성이 인천항에서 Walky Talky로 관제탑과 Tug Boat와 통화하며 도선을 하고 있다.
김길성(金吉成)은 1941년 6월 30일 통영 도천리에서 김영휘와 박순명 사이 6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동래부사를 끝으로 통영 도릿골로 낙향했다. 조부는 한학자인데 수많은 한서(漢書)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서당훈장을 하면서 그 서적들을 김길성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개구쟁이에다 싸움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에서 싸움을 벌려 온몸에 피멍이 들고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가 분노하여 호되게 꾸짖는데 지나가던 노스님이 "훗날 6국(六國)을 넘나드는 인물이 되어 집안에 기둥이 될 관상이요. 과하게 질책하지 마시오"라고 당부했단다.

김길성은 통영중학교와 통영고등학교에서 1~2등을 다투며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법관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직으로 법과대학을 포기하고 해양대학 항해과 15기로 입학했다. 6국을 넘나들게 된다는 노스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2년만 5대양을 항해하며 세상구경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63년 4월 해운공사 제주호 3항사로 해상생활을 시작하여 1965년에 라스코해운 2항사로 송출을 나갔다. 당시의 2항사 급료가 140불로 국적선박 선장의 급료와 맞먹었다.

그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도 법관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해 당직이 끝나면 법률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실직상태에 있어 집안 살림살이에다 여섯 동생의 교육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 2년만 승선하겠다던 생각을 접었다. 송출 6년이 되던 1971년 8월에 9000톤급 PACPRINCESS호의 선장이 되었다. 겨우 30세에 선장이 되어 기쁨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기쁨과 자부심은 잠시뿐이고 시련의 연속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잡화를 풀어놓고 곡물을 실으러 시카고로 항해하던 중 선원이 트윈 데크 해치 빔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소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출혈이 심해 당장 죽을 것만 같았다. 선내의 생명을 책임진 선장으로서 앞이 캄캄했다. 쟌드푸카 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Traffic Service에 응급구조를 요청했다. 가까운 부두에 접안시키라는 답신을 받았다.

마침 가까운데 부두가 있었으나 사용한 지가 오래되어 목조(木造)가 썩어있어 부두로 사용할 없는 상태였다. 접안할 자신이 없었다. 터그보트도 줄잡이도 없고 파이로트 마저 없는 부두에 새내기 선장의 실력으로 접안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선원이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젊음의 패기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우현 앵커를 투묘하면서 천천히 접근하여 좌현접안을 기적적으로 성공시켰다. Landing Boom을 이용하여 선원이 부두에 내려가 계류색을 잡았다. 접안이 끝나자 앰뷸런스가 와서 환자를 후송했다. 20일 후 마지막 항구 베이코모로 그 선원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듯 더없이 반가웠다.

또 한 차례 시련이 닥쳐왔다. 오대호에서 밀을 싣고 일본으로 항해 중이었다. 초대형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의 중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본선이 파도에 가랑잎처럼 휩쓸리고 있었다. 이대로 항해하다가는 배가 두 동강이 나거나 파도가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선장의 임무가 선원과 선박을 살리는 것이라고 각오했다. 우선 태풍의 중심에서 벗어나야만했다. 파고가 10m을 훌쩍 넘어 롤링과 피칭으로 선체가 요동치는데 선수의 방향을 어떻게 돌려놓을 수 있을까!! 심장은 쿵덕쿵덕 뛰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천우신조로 선수를 180도로 돌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3일간 미국 쪽으로 도망쳤다. 선체가 Crest(파도마루)에서 Trough(파도의 골)로 떨어졌을 때 30m의 파벽(波壁)이 무너져 성난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뒤에서 몰아치는 파도가 선장실 통로를 물바다로 만들었고, 식당과 취사실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아수라장이었다. 선원들과 파도의 싸움이 병사들과 적군의 싸움만 못하랴! 병사는 시체라도 찾을 수 있는데 선원은 시체도 찾을 수 없으니! 6대 해운국가, 10위권의 경제대국이될 때까지 그 이면에 선원들의 고통과 희생이 잠겨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얼마나 이해해주는지!

김길성은 인천항 도선사가 되었다. 1980년 7월 24일 천경해운 천성호의 첫 도선을 시작으로 2008년 4월 현재까지 1만 4000척을 도선했다. 수도권의 산업원자재와 생필품원료의 수입과 그리고 제품수출을 담당하는 인천항에서 1만 4000척의 도선은 국가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도선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 도선을 했는데 무슨 공헌이냐고 폄훼하겠으나 그렇지가 않다.

눈비가 와도,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농무가 끼어도 밤낮으로 도선을 해야만 한다. 파도가 넘실거려 배가 요동치는데 줄사다리에 매달린 도선사를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사고를 걱정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막상 사고가 나면 힘들게 벌었던 도선수입이 날아갔다. 그가 도선사로 근무한 28년간 고달픈 직무에 시달린 도선사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인원이 인천항에서만 11명에 이르렀다.

어느 도선사는 대형 사고로 인해 1년 헛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세금은 그대로 내고 변호사 수임료가 실제와 다르고 유족보상비도 법정 외로 부담했다. 샐러리맨이 받는 퇴직금, 보너스, 교통여비, 식비가 없다. 도선사의 수입금으로 감당해야한다. 사고수습비용과 생명보상금도 스스로 부담해야한다.

김길성은 인천항 도선사를 하면서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는 일은 인천항 LNG기지 위치선정에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경제비서관 박원서가 주관하여 LNG기지 위치선정 회의가 청와대에서 개최되었다. 건설부, 동력자원부, 해운항만청, 인천시청,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가 참석했다. 동력자원부,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는 청와대와 사전에 협의하여 현 영종대교가 지나는 일도 부근을 결정해 두고서 요식행위로 회의를 소집했다.

일도 부근에 화력발전소와 LNG기지를 함께 건설하면 비용과 공기가 대폭 축소할 수 있다. 또한 수도권과 가까워 가스배관 거리를 단축할 수도 있어 비용과 공기 감축이 가능했다. 정부투자기관이 예산절감과 공기단축을 한다는데 청와대나 정부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해운항만청은 인천항의 운영상 그 위치를 받아드릴 수 없어 반대했다. 필자가 당시 항무국장으로 참석해 "인천항은 조차가 9m나 되는데다가 대형선박이 항행하기엔 수로가 협소합니다. 많은 유조선들이 입출항해 크고 작은 해난사고가 빈번합니다. LNG선박이 항행하게 된다면 참담한 대형사고가 발생할 것이 불을 보듯 확실하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인천항을 포기하든가 일도기지를 포기하든가 양자택일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론이 나지 않아 며칠 후 청와대에서 다시 회의가 소집됐다. 인천항을 손금 보듯이 잘 파악하고 있던 김길성이 인천도선사협회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인천항은 1년에 약 50일간 안개가 끼고 조석간만차가 10m에 3~4노트 유속에다 갑문을 드나드는 선박과 그 외 연안여객선, 어선, 군함 등으로 통항 밀도가 엄청 높습니다. 여기에 천연액화가스를 가득 실은 LNG선박과 충돌한다면 원자폭탄과 맞먹는 폭발위력을 어느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반대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항구의 제일 안쪽에다 LNG기지를 건설한 예가 없습니다"라는 딱 부러진 논리에 당초 계획을 철회하고 현 송도기지로 바꾸었다.

김길성은 송도 앞에 매립해 LNG기지를 건설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된다는 말을 듣고서 인천항건설사무소를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시설사무관에게 의뢰하여 일도와 송도와의 건설비용을 비교했던 바 비용과 공기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일도는 차로 흙을 실어다 토지와 부두를 조성하는데 반해 송도는 파이프로 뻘을 준설투기장에다 퍼붓기만 하면 토지가 조성될 수 있었다. 여기다가 항로준설의 효과는 비용으로 따지면 천문학적이었다. 그는 미심 적어 시설사무관에게 재차 계산을 부탁했던 바 그 계산이 정확함을 확인했다. 청와대에서 그의 주장이 국가에 크나큰 기여라고 자부하고 있다.

필자가 "그때 청와대경제비서관의 반응이 생각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분이 민간인 신분으로 참석한 저에게 불쾌해 했지요. 노골적으로 '당신들이 백년대계를 망치려는 거요? 예비전력(電力)이 바닥났는데 제한 송전을 하게 되면 책임지겠어요?'라고 몰아붙이던 장면이 지금도 훤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이어 "요즘 LNG선박을 도선할 때 옛날을 회상하면서 LNG기지가 송도국제도시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걱정스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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