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이재균 국토해양부 차관이 부산해양청장 재임시 해양대학 김순갑 총장과의 관학협정조인식(2004. 3. 31)
김일손(세조10년~연사군4년)은 춘추관 사관으로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참수 당했고,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잘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림(士林)들도 화를 당했는데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김종직이 항우(項羽)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썼다. 이 글을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이라고 이극돈이 폭군 연산군에게 발고하여 발단되었던 사건이었다.

김순갑(金順甲)은 김일손의 후손으로 1948년 11월 3일 경남 고성군 마암면에서 김판세와 박순자 사이에 3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유학을 수상하고 한학(漢學)에 정진하는 집안이라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혀가며 학자적 품성을 닦았다. 그는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12월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24기로 졸업했다.

졸업을 하고서 곧바로 모교의 요청으로 조교로 근무하면서 1973년 3월에 부산대학 조선공학과에 학사 편입했다. 이어서 부산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1977년 2월에 조선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82년 4월에 일본 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1년간 연구생과 3년간의 학위과정을 수학하고 <선박의 파랑 중 운항성능평가에 관한 연구>란 논제로 조선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해양대학으로 돌아와 강의와 연구에 진력하면서 1992년에 기획연구실장, 1995년에 교무처장, 1988년에는 해사대학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아 대학행정의 경험과 경륜을 쌓았다. 영예스럽게도 2004년 3월 6일 모교 한국해양대학교 제4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총장취임사에서 21세기는 해양시대, 정보화시대, 국제화시대임을 강조하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육성 배출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우수인력의 유치와 노후시설의 교체, 첨단 시설·설비의 설치 등을 통해 대학을 연구하는 분위기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은 국고와 학생등록금에만 의존할 수 없음으로 총장실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학부모와 동창회, 지역사회와 관련업계와의 협력과 유대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고, 미래는 앞서가는 자의 몫이다"란 현란한 수사(修辭)와 "결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발품을 팔아 예산을 확보하는데 앞장서겠다"란 실천의지를 다짐하며 시작했다.

그는 4년 총장임기를 마치는 이임사에서 "우리 대학의 교육, 행정, 시설,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변화와 성장을 이룩하였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작고 사소한 것까지도 결코 저 혼자서 이룩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총장인 저 자신부터 몸을 낮추고 발로 뛰면서 부처장님과 교직원, 학생 여러분들과 함께 이룩했습니다"라고 자신의 공로보다 공동체의 단합된 힘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교직원은 743명에서 792명으로, 학생은 9419명에서 9727명으로 증원되었습니다. 학부 졸업생의 취업률이 63.3%에서 71.2%로 늘어났고, 장학금 수혜율도 72.2%에서 78.7%로 높였습니다. 순수 발전기금 약 70억 원과 매년 정기적 기부금액을 발전기금으로 환산한 약 69억 원을 합산한다면 139억 원을 모금했습니다"라고 재임 중 실적을 잔잔하게 평가했다.

또한 승선근무예비역제도 실시를 위한 병역법이 개정되었고, 국립대혁신평가에서 A등급의 우수대학으로 선정되는 역량을 보였다. 또한 한국해양연구원을 포함하여 해양수산관련 공공기관, 항만물류전문인력양성, 종합물류경영지원센터 등을 유치하여 해양대학을 중심으로 동삼동 매립지가 산·학·관의 해양연구클러스터의 단지로 조성되었다.

김순갑은 총장재임 중에 신조 한바다호를 취항시켰고, 아시아지역 해양수산대학포럼을 매년 개최했다. 세계해사대학연합의 아시아LNG교육센터, 산·학·연 기술지원센터, 교수학습지원센터 등도 설치하여 해양대학이 글로벌대학으로 가는 기틀을 구축했다.

그는 또 이임사에서 "대학 건물 하나 더 짓고 많은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안입니다. 우수한 인재가 모여들고 꿈을 키워가는 한국해양대학의 이상을 이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하고서 이어 "우리나라 해양사상 고취와 해양문화 창달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데도 노력해 왔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국공립대학교 총장협의회의 회장인 강원대학교 최형섭 총장은 김순갑을 존경받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대학행정의 책임자로서, 다양한 대외기구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지방대학이란 어려운 여건에서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으로 해양대학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고 격찬했다. 그 구체적인 업적으로 아시아 제일의 연습선 건조를 비롯하여 국제협력관 등 많은 시설과 설비를 갖추었고, 승선근무인력에 대한 병역문제를 해결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이임축사에 덕담이 없을 수 없겠으나 김순갑이 해양대학 재도약의 기틀을 다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일본에서 건조했던 연습선을 <하나의 바다>, <커다란 바다>란 포부를 담아 1975년에 <한바다호>라고 명명하였다. 5대양을 제패하겠다는 결의에 넘친 해양대학 실습생들이 357항차에 36개국 63개 항구를 입출항했다. 가는 곳마다 대한민국과 한국해양대학의 위상을 높였던 한바다호가 2005년 10월 28일 서른 살 나이로 퇴역되었다.

그 뒤를 이어 새로 건조한 한바다호의 명명식이 2005년 12월 5일 거행되었다. 교육과 연구 중심의 종합대학, 해양특성화대학으로서 해운·해양 분야의 세계최고의 대학으로 자리매김 된 해양대학이, 새로운 한바다호로 인해 대한민국을 해양강국으로 지향하는 첨병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바다호가 해양강국 첨병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첫째, 6686톤의 세계 최대 규모인 연습선 한바다호가 어떤 해상조건에서도 학생들의 교육·훈련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다.

둘째, 미래지향적 전자제어기관 ME Type과 CAM 구동엔진 MC Type은 운전과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세계최초의 Dual Engine을 탑재했다.

셋째, 세계적 IT강국이란 대한민국 위상에 걸맞게 IT교육을 시행할 수 있도록 선내 전 구역에 위성인터넷과 위성TV설비를 설치하고서 본선의 위치와 운항·기상 상태를 실시간대로 표시해 주는 운항종합 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최첨단 장비와 교육기자재를 완비한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연습선이다.

한바다호가 외국항구에서 각종 행사를 개최할 때마다 찬사와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순수한 대한민국의 기술과 기자재로 건조되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의 국력과 최상의 조선기술국가임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있다.

김순갑은 일본 선박해양공학회 및 일본 조선학회의 정회원으로, 국내학회들에서는 책임을 맡아 활발한 학술활동을 해 오고 있다. <연안여객선의 내항성능 위험도를 이용한 항해안전성 평가에 관한 연구>, <선회 중 전복한 저건현 내항탱커의 복원성에 관한 연구>, <기상분포의 특성에 의한 우리나라의 기후변형에 관한 연구> 등 23편의 연구논문을 국내외 학회지에 발표했다. 저서로는 <선박적하>, <항해응용역학> 등 4권이 있다.

연구보고서도 <선박용 종합항법장치의 개발>과 <마린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선박운항실습 교육과정의 개발에 관한 연구> 등 7편을 산업자원부와 조선해양연구센터에 제출한바 있다. 연구논문과 연구보고서를 통해 체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선박용 종합항법 장치>를 특허청에 출원하여 발명특허도 받은바 있다. 그는 일본관서조선협회로부터 최우수논문상을, 교육부로부터 국민교육유공자표창, 대통령표창 등을 수상했다.

필자가 "총장이란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셨으니 앞으로 계획은…?"이라고 묻자 김순갑은 "평교수로 돌아가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해운계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는데 제가 할 일이 있으면 조용하게 보답하면서 평범하게 살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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