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부산신항 기공식에서 공사개요 보고를 청취하는 장면(1997. 11. 4). 왼쪽부터 신상우 전장관, 조정제 장관, 김영삼 대통령, 한사람 건너 김혁규 경남지사, 문점수 부산시장, 김진재 의원.
우리 민족은 선사시대부터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진취적인 민족이었다.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조선조에 반상(班常)이 엄격히 구별되어 사대부들이 뱃사람을 천민으로 분류했고, 심지어 갯가에 사는 백성들마저 하대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로 인해 바다와 담을 쌓아 폐쇄적이고 고루한 파쟁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대부분의 해양수산부장관이나 해운항만청장과는 달리 조정제(趙正濟)는 갯가에서 태어나 1997년 8월 7일 2대 바다의 수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취임하여 다음해 3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때 물러나 1년 미만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관 취임 전과 후에 바다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조정제는 1939년 5월 25일 경남 고성군 거류면 용산에서 조수갑과 최두의 사이에 2남 3여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종종걸음으로 어머니를 따라가 갯가 <속시개>에서 꼬막을 캐고 해초를 땄다. 아직도 그때 그 맛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어머니한테 임진왜란 때 당항포에서 수많은 왜군과 왜선을 격파했다'는 충무공의 전공(戰功)을 듣고서, '나도 커서 충무공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때를 가끔 회상한다고 했다.

조정제는 중학교까지는 고향에서 다니다가 부산에서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이 되겠다고 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외무고시가 없어져 부득이 재경직 행정고시에 응시해 1966년에 합격했다.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투자기획과에 사무관으로 사회 첫 발을 내딛었다.

투자총괄 겸 수산업에 대한 직무를 맡았던 것이 그의 두 번째 바다와의 인연이었다. 당시 수산정책은 연근해 어선을 동력화하는데 그쳤고, 원양어업은 중고 참치어선을 일본에서 차관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고 그는 유학을 떠났다. 미국 중부에 있는 캔사스주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1976년 3월에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자금계획과장으로 승진해서 국제수지와 재정, 그리고 금융을 총괄했다.

조정제는 1978년 4월 새로 발족한 국토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제2차 국토개발 10개년 계획에 연구책임자로 참여하여 포항제철 제2후보지 선정의 용역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이것이 세 번째로 바다와 인연이었고 동시에 해운항만과 첫 대면이었다.

그 용역은 제철소 후보지를 아산만과 광양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타당성은 국토연구원이, 기술적 타당성은 프랑스 르하브르 항만청 기술부서가 각각 담당했다. 용역책임자로 난생 처음 르하브르항과 로테르담항 등 유럽의 선진항만을 시찰하며 항만에 대한 안목을 높였다.

로테르담항은 당시 무인 항만운영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고, 바다를 매립하여 10년간 땅이 다져지기를 기다리는 여유가 인상적이었다. 안내자가 매립지에 서식하고 있는 수많은 갈매기를 가리키며 "전생에 선장들이었는데 바다가 그리워 갈매기로 다시 태어났지요"라는 설명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제압하고 세계를 제패하기 전에 네덜란드가 스페인, 포르투갈과 더불어 5대양을 종횡무진으로 항해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희생된 수많은 선장과 선원들이 환생했단 말인가?

타당성검토는 광양만은 연약지반이 문제였고 막대한 양식어업을 보상해야만 했다. 반면 아산만은 간만차가 커서 건설비와 운영비가 많이 소요되었다. 분석결과 양 항만의 수익성은 엇비슷하게 나타났다.

조정제는 국토균형개발을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광양만을 추천했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건설부가 아산만을 의중에 두고 은근히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1981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주재하고 남덕우 부총리, 서석준 상공장관, 김주남 건설장관, 박태준 포철회장이 참여하는 청와대회의에서 광양만으로 결정이 났다.

그는 1990년 10월 국토연구원 부원장을 마치고 KDI에서 초빙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4년 5월 해운산업연구원(KMI)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것이 네 번째 인연으로 해운항만과는 본격적인 대면이었다. 그는 '비전 2020'란 제목으로 해운산업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했다. 이 연구에서 발상을 전환하기 위해 세계지도를 거꾸로 놓고 세계를 바라볼 것을 제시했다. 한반도가 거대한 만주벌판을 깔고 앉아 앞을 바라보면, 왼편의 일본은 한반도의 방파제가 되고, 오른편의 중국연안은 한반도의 호안이 되어 한반도가 태평양으로 웅비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부산항은 미주와 유럽으로 발진하는 세계간선항로(Main Trunk Route)의 중심항만(Mega Hub Port)이 된다.

KMI원장 재임 중에 '항운노조의 상용화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다가 곤욕을 치렀다. 인천항운노조가 버스 몇 대를 대절하고 올라와 세미나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위원장이 전화로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어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수모를 당했던 항운노조 상용화가 현재 시행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는 해양수산부 신설에 일조했다. 해양수산부가 발족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정리하여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광일에게 전달했다. 요지는 '종합적이고 효율적인 해양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해양수산부 신설이 절실하다. 해양수산부 신설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문민정부의 정책에 배치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공무원 증원을 하지 않고도 분산되어 있는 기능을 통합하면 작고 강한 정부가 된다'라는 논리를 폈다.

우여곡절 끝에 1996년 8월에 해양수산부가 시설되어 신상우가 초대 해양수산부장관으로 부임했다. 1년 후 1997년 8월 7일 조정제가 그 뒤를 이어 2대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것이 바다와의 다섯 번째의 인연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물러날 때까지 재임기간이 1년 미만 이었지만 항만개발에 박차를 가해 1997년 11월 4일에 김영삼 대통령을 모시고 역사적인 부산신항 기공식을 거행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장관재임 중에 해운보다 낙후된 수산정책개발에 역점을 두었다. 수산업을 기업경영 차원의 경제적 어업으로 육성하려는 정책을 폈고 바다목장사업과 자율관리어업에 관심을 쏟았다. 바다목장사업을 1998년도 예산에 반영코자 했으나 재경원이 이를 삭감해버렸다. 그는 강경식 부총리에게 수산업은 가두리양식이 아닌 바다목장사업 외에 별다른 지원정책이 없음을 설득하여 삭감된 예산을 되살렸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통영만에 바다목장 첫 사업이 착수되었다.

조정제는 장관을 퇴임하고서 김대중 정부에서 1998년 4월부터 2년간 규제개혁위원회의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다. 규제개혁은 규제를 완화하고 진입을 용이하게 하여 경쟁을 촉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경제를 전공한 그에게는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해운산업 분야에서도 도선업 등 각가지 규제를 풀었다.

그는 또 고건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장으로 위촉되어 2003년 5월부터 2년간 각 부처가 추진하는 정책들을 분석평가 했다. 해양수산부에는 항운노조상용화 조기실시를 촉구했다. 그리고 항만개발이 수요를 초과하지 않도록 수급전망을 재검토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광양항만에 포항제철 제2공장을 유치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여 훗날 광양항만에 컨테이너부두가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신항 건설 기공식도 거행하여 우리나라 2대 컨테이너항만 건설에 직간접으로 관여한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땅과 바다를 개발하는 연구와 계획을 직접해본 전문가이며, 직업관료로서 그동안 보고 들은 체험들을 신문 잡지에 기고했다. 그 글들을 모아 '좁은 땅 넓은 바다'라는 이름을 붙여 수상집을 발간했다. 이 책이 2002년 문화관광부의 국민권장도서로 선정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필자가 "근자에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불곡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에서 글을 쓰며 여유작작(餘裕綽綽)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해운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원로·중견 해운인들의 모임인 컴퍼스클럽 조찬회에 나아가 해운계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 어린이 돕는 모임'의 이사장도 맡고 있습니다. 집안 일이지만 홍익대학에 설계전문교수인 장남과의 부자간 담론에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라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조정제는 대한국토도시학회의 현정국토개발상을 비롯해 국민훈장모란장, 청조근정훈장, 그리고 그의 모교 미국 캔사스주립대학교(KSU)의 자랑스러운 동문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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