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논설위원 耕海 金鍾吉

▲ 한국 최초의 해운이론서 '해운경제학'을 저술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해운물류학회에서 지난 2005년에 '초정학술상'을 수상한 민성규(오른쪽). 초정학술상 스폰서인 C&그룹 임병석회장(왼쪽)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민성규(閔星奎)는 1934년 12월 20일에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민동언과 최상삼 사이에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기림국민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 해방과 동시에 월남하여 할아버지 고향인 충남 홍성으로 귀향했다. 홍성중학교(6년제)를 다니던 1950년 6월 충남에서 유일하게 시범적으로 설립된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용산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국립중앙박물관 2층 휴게실에 필자가 민성규와 나란히 앉았다. 대학입학 동기를 묻자 "나는 해양대학을 전연 몰랐는데 고등학교 친구가 같이 가자고 꼬여 응시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불합격되고 나만 합격되어 어찌 미안하던지…. 한국해운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국해양대학에 6·25전쟁 중인 1953년 3월 항해학과 9기로 입학했지요. 휴전직후인 그 해 가을 전쟁으로 파괴된 군산 교사(校舍)를 남겨둔 채 부산으로 이사했지요. 거제리 초등학교 뒤 산기슭 공터에 텐트를 치고 피난살이 공부가 2여년 계속되었지요"라고 아스라이 떠오르는 추억인양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3학년이 되어 영도 동삼동에 UNCRA(유엔한국부흥기구)의 원조자금으로 신축된 해양대학의 진입도로를 닦는데 매일 동원되어 죽을 맛이었지요. 박옥규 해군참모총장 재임기간으로 짐작되는데 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에 합병된다고 하여 결사반대를 외쳤던 기억도 생생하네요. 대학의 랑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막교실, 배고픔, 군사훈련, 상급생의 혹독한 기합으로 점철되었지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라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승선 실습은요?"라는 질문에 "당시 유일한 5040gt의 유조선 천지호에서 실습을 했었지요"라고 대답했다. 천지호는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할 때 후원자였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주영한의 주선으로 1953년에 구입했다. 천지호 외에 부산호, 만산호, 동해호, 서해호, 남해호 6척을 정부보유 외화로 도입되었다. 이재송 선장이 천지호를 인수하기 위해 이태리로 가서 점검해보니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해운공사에 보고했으나, 그래도 인수해서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도리없이 인수하여 귀항 중에 몇 번이고 기관고장이 발생했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24기로 졸업한 유능한 기관장 남재술이 해상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수리를 거듭하면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천신만고 끝에 천지호를 싱가포르까지 끌고 온 이재송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러 해운공사 사장에게 "I kill you"란 전문을 타전하고는 하선해버렸던 일화가 유명하다.

민성규는 "그 천지호가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정기용선 되어 고베와 싱가포르에서 이중으로 대대적인 수리와 탱크 크리닝을 마친 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발릭파팡에서 Batching Oil을 실었어요. 파키스탄으로 항해하다가 애드미랄 스털링워프라는 암초에 좌초되었어요. SOS를 타전하여 싱가포르에 주둔하였던 영국해군 구조단이 긴급 출동하여 싱가포르로 예인되었어요"라고 5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고 당시 선장이 진해고등해원양성소 22기로 졸업한 유치신이었다. 동승하고 있었던 선장출신의 미국인 슈퍼카고나 용선자 대리점과 협의할 때면 언제나 실습생 민성규가 통역을 했다. 선장이 천측도 못해 대리점의 영국인 해무감독이 평소 은근히 선장을 무시해왔는데 하루는 선장실에서 화물탱크 쪽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사고수습 차 파견되어 와있던 해운공사 과장 연장성에게 영국인 해무감독이 당장 선장교체를 요구했다.

고베고등상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방 후에 부산항무청장을 역임한 성철득이 교체선장으로 부임했다. 선내 분위기가 긴장되며 선내질서가 확립되었다. 천지호의 요리사가 해방 전에 인천/상해 정기여객선으로 취항했던 김천호의 주방출신이라 그때 성철득을 선장으로 모셨다. 성철득이 선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당당함을 잘 알고 있는 그 요리사가 성철득에게 지극 정성이었다. 요리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음식을 만들어 성철득이 식사를 하면 일류 호텔 레스토랑에서 귀빈에게 시중드는 웨이터처럼 흰 가운을 차려입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시간 이상을 차례자세로 대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본 사관들과 보통선원들이 선장의 권위에 눌려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아도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다.

남들이 10년을 승선해도 경험하지 못한 천지호에서 정기용선과 대형사고의 사후처리과정을 민성규는 체험했다. 그리고 성철득이 실습생에게 정기용선계약과 해상보험, 해운실무 등을 다정다감하게 가르쳐 주었다. 3개월이 지나 민성규는 싱가포르에서 한국/인도 간에 취항하던 여수호로 옮겨 실습하다가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수많은 기관차가 파괴되어 인도에서 중고기관차를 도입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항만에는 대형기중기가 없어 유일하게 헤비데릭이 설치된 여수호가 중고열차를 수송했다.

해양대학을 졸업해도 배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육상취직도 어려울 때 그는 해운조합에 취직이 되었다. 천지호의 체험에서 자극받아 해상보험과 용선계약을 본격적으로 독학한 것이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5년간 공제과장과 기획과장을 맡아 해운조합의 핵심역할을 했다. 당시 해운조합의 진용은 석두옥 이사장을 비롯하여 전무 서정렬, 관리부장 방재형, 공제부장 윤제술이었다. 그 외에 과장 등 10여명의 직원들이 본부에 근무했고, 각 도별로 지부가 있었는데 여객수송이 많았던 인천, 목포, 부산 지부가 규모가 컸었다.

"석두옥 이사장은 어떤 분이었어요?"란 질문에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의 품격에 차분하고 학구적이었어요. 좌담을 할 때면 위트와 유머감각이 넘쳤고 통찰력이 대단했어요. 훤칠한 외모에 걸맞게 통이 컸지요"라고 소개했다. 석두옥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까지 독파하여 한문은 물론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식견도 높았다. 1921년에 인천해원양성소 별과 항해과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의 일본/블라디보스토크 간을 운항하던 청진환(淸津丸)의 수부견습(水夫見習)으로 승선했다.

그는 화장실 청소부를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아 을종1등 항해사 면허장을 취득했다. 해운공사 사장까지 올랐고 한국선주협회 회장과 한국해운조합 이사장을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외항해운과 내항해운 모두를 아우른 해운계의 거목이 될 때까지 영욕이 점철된 해운인생 89세로 영면했다.  

민성규는 해운조합에 근무하면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이수하는 학구열이 있었기에 1967년 해양대학 전임강사로 변신했다. 그가 전직한 동기를 "동기생 양시곤 교수가 해양대학으로 오라고 권유이었어요. 해운조합 봉급과 비교하면 1/3밖에 안 되어 생계가 어려웠지만 학생을 가르친다는 보람으로 흔쾌히 옮겼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해운론 강의부터 시작해서 해상법과 해운실무 해상보험 해사법규 등을 두루 맡았다. 70년대 중반에 배병태 교수와 해양대학의 장래를 논의하면서 전통적 상선대학의 항해과 기관과 범주를 뛰어넘어 해양에 관련된 다양한 학과의 신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바다에 매골'이란 외골수의식이 투철했던 원로교수와 동문들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대학들이 거대화 추세로 가고 대학의 적정재정규모가 학생정원 최소 4000명이라는 중론이었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라 80년에야 홍영표 학장이 학과신설을 수용했다.

홍영표는 삼척공고와 해양대학 기관과를 거쳐 도교대학 공학박사 출신이라 주위에서 그의 시야가 편협하다고 했으나 새로운 제안을 수용하는 과단성을 보여 해운경영학과, 기관공학과, 해사법학과를 신설했다.

민성규는 해양행정관서와 선박회사는 해기사 출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미국, 프랑서, 중국이 그렇다고 했다. 그가 1991년 중국 항주에서 개최된 아·태지역 해운학회에 참석해서 중국 교통부장관과 COSCO 등 선박회사의 CEO가 모두 해기사 출신이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찬란했던 영국해운이 지금은 미미한 존재로 전락한데는 행정가나 업계의 CEO가 모두 'Ox-Bridge'대학에서 역사, PPE(철학 정치학 경제학)를 전공했기 때문에 컨테이너화의 해운혁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해운경영학과가 New York Maritime Collage의 형태로 되기를 희망했었지요. 그 대학은 해운경영이나 조선공학 등을 전공하더라도 해기사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MIT에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관련된 수많은 학과가 있지만 모두 이공계 소양을 갖추어야하는 것과 같이…. 요즘 우리는  본질을 제쳐두고 주객이 전도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해운학회가 해운이론과 해운정책, 해운역사 등 해운전반을 연구해왔는데 해운물류학회라고 문패를 바꾼 이후론 해운논문이 현저히 줄어졌어요. 해사법학과도 '해사'를 떼고 법학과로 바꾸었는데 그렇다면 해양대학에 법학과를 둘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민성규의 인생역정을 보면 우리해운의 현대사가 그에게 묻어있는 것 같다. 해양대학에서 1967년부터 33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대내적으론 발전계획기초위원, 해운경영학과장, 해운연구소장 등 다양한 보직을 맡아 대학과 학문발전에 기여했다. 대외적으론 국무총리실 해양법대책자문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 해운항만청 해운산업합리화심의위원 등을 위촉받아 정부정책에 관여했다. 항해학회와 항만경제학회 등 학회활동에 참여했고, 특히 해운학회는 창립발기인으로서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역사란 영웅이 만들기보다 개개인 민초의 땀과 고뇌로 얼룩진 수많은 체험들이 모여 역사의 대하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그는 6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고 저서로는 1973년에 출판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운이론서<해운경제학>을 비롯하여 <새 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해양오염에 관한 국제협약> 등 10권이 있다. 그가 <해운경제학>으로 해운물류학회가 5년마다 시상하는 저술부문의 초정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