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편집위원 耕海 金鍾吉

▲ 목포해양대학의 유달호를 관리이환 받아 한우리호로 명명하고 취항식 기념사를 하는 유명윤(2004. 4. 23.).
유명윤(柳明胤)은 1950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에서 류문권과 김금련 사이에 3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진해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12월 한국해양대학 항해학과 24기로 졸업했다. 그는 극동해운  등에서 승선하여 선장경력까지 쌓고는 해기연수원 교수가 되었다.

1967년 토리 캔년호의 사고를 시작으로 1978년의 아모코 카디즈호까지의  대형 기름유출사고가 선원 자질부족에 기인되었다. 당시에는 각국 정부가 선원자격을 임의로 규정하고 있었다. 들쭉날쭉한 자격기준을 국제적 기준을 설정되어야 한다는 국제적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국제해사기구(IMO)가 '선원의 훈련, 자격증명 및 당직근무에 관한 국제협약(STCW)'을 채택했다. 그리고 영국 등 유럽 14개국이 '항만국통제에 관한 양해각서'를 채택하여 기준미달선박에 대해 통제(PSC)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사항이 전개되자 한국선원 약 7만 명이 승선하여 국제항해에 취항하고 있는 국적선박과 송출선박들이 발이 묶이게 되었다. 해운항만청은 STCW협약을 비준하여 IMO에 기탁하고 협약에 적합하게 선원법과 선박직원법 전면개정에 착수했다. 동시에 선원재교육훈련 기관인 해기연수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선원정책의 대변혁에 박차를 가했다.

사전에 정부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여, 해기사협회가 임시로 선원재교육을 실시하다 남은 잔액 5000만원을 인계받아 1983년 6월 30일 해기연수원을 발족시켰다. 강의실과 기숙사는 해운항만청이 인수한 동명목재의 건물 일부를 개수하여 7월 27일부터 재교육에 들어갔다. 이준수 운영위원장과 박용섭 해양대학 교수가 선발한 우수한 교수요원이 연수원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위급할 때 단합하여 위기를 극하는 한국인의 저력이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명윤은 "초창기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교재개발이었습니다. 구명정과 구명뗏목은 선박회사에서 구한 Instruction Manual을 참고하여 교재를 만들었으나 생존기술(Survival Technique)은 참고할 자료가 없어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던 연수생이 교본을 보관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교재를 만들었지요"라고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교수부장을 맡으면서 국제협약과 국내법에서 요구하는 훈련과정을 본격적으로 개발해갔다. 자동화, 전문화, 거대화된 선박을 운항하려면 선원의 기술이 고도화·정밀화되어야했다. 이를 위해 시뮬레이터와 같은 첨단교육장비가 필요했지만 해양대학에도 없는 첨단장비를 연수원이 먼저 확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유명윤은 급변하는 국제해운환경에서 한국해운이 살아남으려면 첨단장비가 필요하다는 자료보따리를 싸들고 관련 부처들을 상대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1986년 액체시뮬레이터, 1987년 선박조정시뮬레이터와 INMARSAT시뮬레이터, 1988년 엔진시뮬레이터, 1997년 해양오염방제시뮬레이터 등을 해기연수원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도입했다. 특히 노르웨이의 NORCTROL에 특별 주문한 선박조정시뮬레이터는 당시 세계최고의 데이터분석과 출력기능을 가졌다. 1988년도 해기연수원의 1년 예산이 11억원에 불과했는데 그 도입가격이 35억원이었다.

그는 연수원이 우수한 인력과 첨단장비를 확보하고도 그 연구역량을 제대로 발휘 못하여 연구소를 부설하기로 했다. 설비연구실, 운항연구실, 해사행정연구실, 해상노동연구실 등 4개 조직을 가진 선박운항기술연구소가 1989년 4월 1일 문을 열었다. 교수부장 유명윤이 소장을 겸임하였고 연구소 운영비는 연구용역수입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연구소는 세양산업과과 대영엔지니어링으로부터 용역을 수주했다. 특히 대영엔지니어링의 '군산항 신부두 선박 접이안(接離岸)의 안정성에 관한 시뮬레이션 검토'의 용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만개발연구이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어 부산시가 계획하였던 '부산 남항 인공섬의 외연 방파제입구의 선박통항과 선박부두접안의 안전성'을 검토하는 용역도 수주했다. 용역비의 절반을 할애하여 미국의 저명한 연구기관인 'CAORF'와 공동연구를 했다. 공동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선진국이 대외비로 하고 있는 연구방법의 know-how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94년 선원선박연구소가 현행 해기사시험 제도를 선진국과 비교하여 개선방행을 모색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유명윤은 이 연구에 참여하여 해기사면허시험의 상설화와 전담기구설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해기연수원에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가 많았다. 우선 해기연수원장이 시험집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해양대학은 물론 해양·수산계 고등학교들까지도 반대했다. 해기연수원이 해기사시험을 전담하게 되면 정규교육기관이 자존심 손상으로 여겼다. 또한 시험출제를 연수원이 주도하게 되면 각 급 학교의 교과목에 영향이 미치게 되고 출제위원 선정도 불이익을 받는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유명윤은 해기연수원이 해기사시험을 전담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첫 단계로 인천해사고등학교에 설치되어있던 시험출제관리실이 낡았다는 이유를 들어 연수원으로 옮겼다. 1995년 초 연수원 종합실습관 3층의 절반을 격리구역으로 설정하고, 출제위원들의 출제작업, 휴식, 취침을 위한 시설을 쾌적하게 꾸몄다. 다음 단계로 그해 3월 31일에 해기사시험을 해양부 감독아래 해기연수원에서 치렀다. 그 다음 단계로 해기연수원에 시험관리실 기구를 설치하여 유명윤이 실장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용역에서 권고한 해기사시험의 상설화는 아직도 미결로 남아있다.

그는 또 해양계 대학과 고등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실습선들을 통합 운영하는 통합승선실습센터를 추진했다. 즉 일본의 항해훈련소와 같은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실습선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는 재산과 예산을 빼앗기는 박탈감 때문에 반대했다. 또한 현재 실습선의 승선요원들이 국가기관이 아닌 센터의 소속이 될 경우 공무원의 신분을 상실하게 된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래서 유명윤은 단계를 낮추어 연수원의 단기양성 졸업생과 부산·인천해사고교 학생들의 승선훈련을 위해 실습선 확보에 나섰다. 해양수산부의 지원을 받아 실습선이 새로 건조되어 불용처분될 목포해양대학의 유달호와 한국해양대학의 한바다호를 우여곡절 끝에 관리이환을 받았다. 어업기술훈련소가 연수원에 통합되면서 어로실습선 갈매기호와 제2갈매기호를 보유하고 있어 모두 4척의 실습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애초 계획했던 통합승선실습센터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실습선을 보유하지 못한 몇몇 학교의 승선실습을 수탁·운영하게 되었다.

급변하는 선박운항기술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교수요원들이 현장체험이 절실했다. 그래서 그는 1988년부터 매년 1~2명씩을 윤번제로 첨단선박에 파견하여 승선체험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수원의 교육훈련이 실무 위주라고 하지만 이론적 토대가 튼튼해야만했다. 교수요원들이 교육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대학원진학을 권고했다. 그 결과 1990년부터 매년 1~2명씩 박사학위를 취득하다가 1995년에는 5면이나 박사가 배출되어 교수요원들의 학력수준이 급상승했다.

그 외에도 스웨덴의 세계해사대학, 영국의 웨일즈대학과 사우스햄프턴대학, 미국의 텍사스주립대학 등 매년 1명씩 유학 또는 연수를 보내 최신의 지식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는 동시에 연수원의 국제교유를 넓혀갔다.

해양수산부가 신설되면서 해기연수원과 어업기술훈련소를 통합하여 1998년 1월 해양수산연수원으로 되었다. 그러나 캠퍼스는 남구 용당동과 영도구 남항동에 분산되어 있었다. 유명윤은 2002년에 동삼동 매립지로의 캠퍼스를  통합하는 '해양수산인력개발계획'을 해양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교사이전 설계비 14억 원을 확보했다. 2006년에 타당성 검정을 거쳐 총 507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고 2010년까지 연차별 재정투입계획을 확정했다.

유명윤은 2001년 1월부터 6년간 해양수산연수원장을 역임하며 연수원을 '세계최고 해양수산인력양성기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 바쳤다. 그는 우리나라 선원교육역사에서 한 획을 긋고 2007년 1월 연수원을 영예롭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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