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과 유년시절

▲ 이종석 사장
나는 열한 살의 나이였지만 논에 모심고, 김매고, 나무하고, 새끼 꼬고, 이엉도 엮었다. 논에 모를 심고 난 후 김을 세 번 매었는데 처음엔 아시, 두 번째는 두벌, 세 번째는 만물이라고 불렀다. ‘아시’는 논풀을 손으로 매주는 것이고, ‘두벌’은 호미로 벼와 벼 사이 흙을 갈아엎어 잡풀을 제거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만물’은 손으로만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이라서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하루는 혼자서 논을 매다가 피로와 허기에 지쳐 논두렁에서 잠이 들었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바로 옆 논 일꾼 셋이서 새참 칼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때 한 젓가락이라도 먹고 싶었던 걸 참았던 생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부지런한 애라는 소문이 나서 이웃 동네에서 “보리를 베어 달라”, “모를 심어 달라”하는 부탁으로 종종 남의 집 일을 했는데 이때만은 쌀이 약간 섞인 보리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나무하는 일은 나의 일상 임무였는데 아침을 먹은 후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무조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다. 소나무 잎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솔거울, 생소나무와 삭쟁이나무, 떡갈나무나 상수리나무, 베어낸 나무뿌리를 캐는 고자배기 등 가리지 않고 나무를 해다가 말려서 아궁이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나무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우리 집(숙부 댁)이 소유한 산이 없기 때문에 남의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하는데, 나무하다가 산주에게 발각되면 심하게 야단을 맞거나 지게, 갈퀴, 낫 등의 나무 도구를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임자 없는 산을 찾자면, 멀리까지 가야만 할 뿐 아니라 웬만큼 멀리 찾아가 보아도 이미 사람들이 나무를 다 해간 곳이라서 땔감을 찾기가 어려웠다. 산에 갈 때는 종종 다른 애들과 함께 갔는데 나무 한 짐을 채우기가 힘드니까 나무 전치기를 하기도 했다. 전치기란 나무를 한 아름씩 모아놓고 갈퀴나 낫 등을 모아놓은 나무에 요령껏 던져서 이긴 사람이 나무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가까운 산에서는 나무하기가 힘들어 힘센 어른들은 멀리 개산까지 나무하러 다녔다. 개산은 수석리에서 삼십 리나 되는 곳인데 서산, 예산, 홍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정식 명칭은 가야산이다.

하루는 개산에 가기로 하고 이른 새벽 도시락을 지게에 매달고 이웃집 힘센 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아저씨 뒤를 달리다시피 따라가서 비탈길을 올라 약 3시간 만에 숲이 울창한 나무 터에 다다랐다. 지게를 받쳐 놓고 갈퀴로 솔거울을 긁어모았다. 역시 나무가 많아 쉽게 한 짐(약 7전)을 해놓고 아저씨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는 집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나뭇짐을 지고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하니 다리가 떨려 쉽게 내려갈 수가 없었다. 몇 번 뒤를 돌아보며 재촉하던 아저씨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떨어졌다는 생각에 추위와 두려움도 잊고 나뭇짐을 지고 무작정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점점 많이 내려 길은 미끄러웠고 나뭇짐은 눈으로 무거워져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힘들게 한 나무였지만 아까운 생각도 없이 한 전(한 아름)을 버렸다.

그러고는 다른 나무꾼들의 뒤를 따라 원벌리라는 산마을을 지날 때는 눈에 발은 빠지고 나뭇짐도 무거워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인기척이 멀어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또 나무 한 전을 길옆에 버리고 정신없이 걸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캄캄한 밤길을 혼자 나뭇짐을 지고 가자니 쉴 생각도 못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로 밤중에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는 개산에 나무하러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근처 산에서 나무를 할 만한 곳이 없어 또 다시 개산으로 나무를 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흘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무려 259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멎었지만 아버지와 둘째 숙부와 넷째 삼촌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할머니는 행방불명이 된 세 아들의 소식을 몰라 무던히도 애를 태우셨다. 고갯길을 넘거나, 밭일을 하시면서도 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시곤 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할머니께서 나의 손을 이끌고 서산군청에 가보자고 하셨다. 반공포로의 석방소식을 듣고 혹시 행방불명된 아들이 돌아올까 싶어서였다. 서산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곳에 가 기다렸더니 정말로 사람들을 가득 실은 군 트럭이 들어왔고, 그 편으로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영천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어 돌아왔다고 하였다. 얼마 후 둘째 숙부도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뒤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서산읍내로 이사했다. 할머니, 아버지, 넷째 고모, 다섯째(막내) 고모, 막내 삼촌, 나, 여동생이 한 식구였다. 서산으로 이사를 왔으나 피난생활로 인해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터가 가까웠으므로 자연히 시장 구경을 자주 가게 되었다. 시장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장사하는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나도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사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밑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장에는 아침저녁으로 장사꾼들의 짐을 나르는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나뭇짐을 많이 져본 경험이 있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날 지게를 지고 시장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너무 어리다고 짐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나 내가 어른 못지않게 힘이 세고 부지런하다는 걸 알고는 일을 시켰다.

고무신 포대, 쌀 등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지게를 지고 일어나면 숨이 꽉 막힐 것 같기도 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안 된다고 할까봐 표내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 한 짐을 날라주면 5원(요즘 돈 1,000원 정도)을 받았는데 일거리가 많지 않아 목돈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돈 일부와 마침 소장사를 하시던 대방틀 고모부(성근용)로부터 250원을 빌려 나도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담배를 받아 팔기 시작했다. 장은 5일마다 열렸는데 서산을 중심으로 7일은 서산장, 8일은 태안장, 9일은 부석장, 10일은 해미장, 11일은 운산(여미)장 그리고 12일은 다시 서산장, 이런 순서였다. 장사하는 사람들(장돌뱅이)은 날이 저물면 짐을 메고 다음 장이 서는 중간까지 걸어가 주막을 잡았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아침 일찍 출발하여 다음 장을 보곤 했다.

나도 이들과 어울려 이런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담배를 팔았으나 계절과 시장 상황에 따라 다양한 물건을 사다가 팔았다. 쌀, 콩 등 곡식류에서부터 고추, 마늘, 계란, 닭, 김, 양말 등 형편에 따라 사다 팔았다. 돈을 만지게 되니 무엇보다 나 자신의 의·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장을 찾아다니다 보니 서산뿐만 아니라, 타 지역 즉 홍성, 예산, 당진, 천안 등에도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교원자격증을 팔탄 넷째 삼촌 자취방에 두고 온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내가 경기 화성 팔탄을 찾아갔다. 피난 시 들렀던 기억을 더듬어서 넷째 삼촌 자취방을 찾았다. 주인 내외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락에 쌓아놓은 우리 짐 보따리를 보여 주었다. 모두 꺼내어 찾아보니 다행히 교원자격증을 찾을 수 있었다. 서산으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해드렸다. 아버지는 너무나 감격해 하시는 표정이셨다. 그때 형편으론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돼지고기를 사다가 나에게 먹으라고 하셨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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