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전학

▲ 이종석 사장
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취직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고향 서산에 있는 서령중학교로 전학하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다시 시골 학교로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학생활이 너무나 힘겨웠고 신문배달만으로는 수입이 적어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서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 건네 보지도 못했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학교에 들러 선생님들께 하직 인사를 하고 전학용 재학증명서를 받아가지고 학교 문을 나섰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고등학교는 기필코 서울에서 다니겠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와서 ○○○를 꼭 만나도록 하겠다.’고 …….

귀향하여 아버지의 알선으로 서령중학교에 편입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되었다. 이젠 숙식 걱정을 하지 않고 학교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서령중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전에 함께 장사하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그들에게 학교에서 배운 영어, 수학 등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중 정순권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 많아 몇 번 만나 영어, 수학 등의 기초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며 영화 구경을 가자고 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호의에 이끌려 영화 구경을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자유부인’이라는 영화였다.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유부남과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내용이었다. 영화가 끝나 퇴장하다 보니 입구에 영어 선생님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는 것을 본 순권이는 자기 외투 깃으로 나를 감싸주면서 빠져나왔다. 그는 나보다는 체격이 월등히 좋았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영어 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더니 어제 극장에 갔었느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극장에 간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일주일간을 교실바닥에서 무릎을 꿇은 채 수업을 듣는 엄한 벌을 받게 되었다.

앞으로는 절대로 학교 규정을 위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굳게 맹세했다. 서령중학교는 서산 구(舊) 향교 건물을 쓰고 있었고 설립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설학교였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탁구, 유도 등 특별활동도 열심히 했다. 내가 전학한 지 얼마 안 되어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곧 나는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과외수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따라서 방학 때도 수업을 했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울로 진학할 궁리를 계속했다. 우리 집 가정 형편에 내가 정상적으로 진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에 가서 암탉 한 마리를 사다가 길렀다. 이 닭이 신통하게도 매일같이 알을 낳았다. 하나도 먹지 않고 모아서 팔았다. 이렇게 모은 돈과 어미 닭을 팔아서 학교 앞 한 농가에서 본, 가슴에 흰색 띠가 있는 신품종 돼지새끼 한 마리를 샀다. 돼지 집을 짓고 새벽에 일어나 양조장에 가서 술지게미를 구해다 먹이고, 매일 풀을 베어다 주는 등 정성을 들여 길렀다. 돼지는 무럭무럭 자랐다. 방학 때는 과외수업도 빠지고 양대리(서산에서 약 6km 거리 해변) 염전에서 갯벌 흙을 져 나르는 품팔이를 했다.

명절 전후에는 시장에 나가 양말, 장갑 등을 팔았다. 그러면서 내가 가야 할 학교를 생각했다. 물론 학비가 덜 드는 학교를 염두에 두었다. 아버지가 청주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되셨고, 사범학교는 국비로 운영되는 학교니 나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순신 장군 같은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사관학교에 많이 진학시킨다는 김석원 장군이 운영하는 서울 성남고등학교가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침 운동(유도)을 함께하는 고교 선배가 있었다. 그는 성남고등학교에서 서령고등학교로 전학 온 선배로 성남고등학교는 각 군 사관학교도 많이 들어가고 유도로도 유명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드디어 졸업이 가까워지고 고등학교 원서를 내야 될 때가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는 특차, 1차, 2차, 3차로 나누어져 시험을 치렀다. 특차는 사범학교, 체신고, 교통고 등 국비로 운영되는 학교였고, 1차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등 소위 일류학교였다. 2차는 1차 시험 합격자 발표 후 치러지는 학교로 성남고, 중동고 등이 여기에 속했다. 3차는 2차 시험 합격자 발표 후에 시행하는 학교시험이었다. 나는 특차인 인천사범학교와 2차인 성남고등학교를 지원하기로 하고, 우선 인천사범학교에 이 학교 상급 학생 편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입학 시험날 학교운동장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모두들 호명에 따라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나만 호명이 안 되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착오로 서령중학교에서 입학원서에 미술성적 기재를 누락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서접수를 했던 학생을 만나 전말을 알아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1차 시험학교들이 있었지만, 내가 생각해 왔던 성남고등학교 외에는 어떤 학교도 응시하고 싶지 않았다. 성남고등학교의 입학원서를 써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마침 중앙대학교에 근무하시는 외삼촌(정필모:鄭駜謨, 후일 중앙대 부총장)이 흑석동에 살고 계셔서 그리로 갔다. 내가 성남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나니 주위에서는 1차 시험에서 실패한 수험생들과 우수한 학생들도 많이 몰릴 것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을 것이라고 걱정들을 많이 했다. 더구나 정원의 1/2은 본교생으로 선발한다고 했다. 시험 기일까지는 아직 2주 이상이 남아 있어 그때까지 외삼촌댁에서 신세지기가 어려워 당시에 경기도 양평의 용문에 사시던 셋째 고모 댁으로 갔다.

나름대로 마무리 시험 준비를 했다. 시험 전날 양평에서 올라와 외삼촌 댁에서 자고 다음 날 성남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다. 나에게는 최초의 큰 시험이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시험을 마쳤지만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합격이 되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걱정이었다. 합격이 된다 해도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합격자 발표일에 당시 대학생이었던 외삼촌(정기모:鄭騏謨, 후일 교육자)과 함께 성남고등학교에 갔다. 외삼촌이 먼저 내 이름을 발견하고는 “합격이다” 하고 기뻐하며 축하해 주셨다. 합격증을 받아가지고 서산 집으로 갔다.

▲ 당시 서산 서령중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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