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었던 고교 진학을 위해

▲ 이종석 사장
 내가 꿈꾸었던 고교 합격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나와 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막내 삼촌을 불러 앉히시고 가정형편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두 사람 모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이때는 아버지가 재혼하시고, 향렬, 종신, 종경 세 동생이 태어나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가정형편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등록금을 달라고 떼를 쓸 수 없어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삼촌도 서산 농림고등학교에 합격되었는데 포기하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우셨다. 그러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했다. 우선 급한 것은 입학금이니 이것을 해결하고 숙식과 학자금은 차후 문제였다. 내가 기르던 돼지가 거의 다 자라 그 돼지를 팔고 그동안 조금씩 벌어서 모아두었던 저금을 모두 찾으니 성남고등학교 입학금은 거의 마련되었다.

그래서 입학금만 가지고 양평 셋째 고모 댁으로 갔다. 아들이 없는 셋째 고모는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시며 나의 애로사항을 듣고는 당분간 숙식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셨다.
서울로 올라와 우선 학교에 입학금을 납부하고 이송훈(중학교 동창)이란 친구와 함께 허름한 월세방 하나를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남고등학교는 역시 듣던대로 훌륭한 학교였다. 커다란 학교건물, 넓은 운동장, 푸른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현관에는 내가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교단 양 옆으로 감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는데, 가을이 되어 감이 익어서 떨어져도 성남학교 학생들은 따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원윤수(元胤洙) 선생과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설립한 이 학교는 이미 고등학교 15회 졸업생을 배출한 전통이 있는 학교였다. 당시 재단이사장은 카이젤 수염을 한 김석원 장군이었고 그는 후에 민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학년 때부터 정규시간 외 아침 추가 학습을 시켰고, 1일 고사라고 하여 매일같이 영어, 수학 등 시험을 보았다. 유도와 기초 군사훈련에 해당하는 교련이라는 학과목이 들어 있었고, 수요일 조례에서는 교가를 부르고 성남 브라스밴드에 맞추어 사열 분열식을 가졌다.

학교생활은 나에게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적인 생활이었다. 그러나 곧 생활비와 학자금의 고갈로 당장 돈벌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동대문시장 도매상에 가서 질 좋은 비누와 학용품을 사가지고, 이발소와 세탁소 등을 찾아다니며 판매했다. 그러나 고학생이니 물건을 팔아달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품질이 좋고 시장보다 싸니 사라고 했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등교하여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했다. 겨울방학 때는 돈을 빌려 동대문시장에서 명태를 사가지고 서산으로 내려가 어시장 소매상인들에게 팔았고, 안면도 김 생산지에 가서 김을 사가지고 서울 동대문시장 도매상들에게 팔기도 했다.

한번은 겨울방학에 김을 사려고 안면도로 내려갔다가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국회에서 농성 중이던 야당(당시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자유당 국회의원만으로 단독, 강행통과 시킨 일이 있었다. 국회 12·24 국가보안법 파동이었다. 내용을 다른 숙박객들에게 설명해 줬다가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형사에게 불려가 혼이 난 일도 있었다. 다행히 그는 내가 학생 신분임을 확인하고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방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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