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용기의 장학금
그때 김석원 장군은 우리 학생들에게는 교장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할아버지 선생님과도 같은 분이었을 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김석원 장군과 마주치면 부동자세로 대하던 때였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듯 부리부리한 눈, 세상이 떠나 갈듯한 목소리만 생각해도 겁이 났다. 그러나 이제 막다른 골목인데 김 장군께 사정 말씀이라도 드려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일요일 아침 비가 내렸다. 나는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로 갔다. 아침부터 본관 현관에서 정문 쪽에 있는 김석원 장군 댁을 응시하면서 장군님이 오시기만 기다렸다.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나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비는 주룩주룩 퍼붓고 있었다.
11시쯤 비가 그치는 듯 했을 때 드디어 카이젤 수염의 김석원 장군께서 망토를 걸치시고 본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장군께서 가까이 오셨을 때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 거수경례를 붙였다. 장군께서는 인사를 받으시면서 재단 이사장실 쪽으로 걸어 가셨다. 나는 장군의 뒤를 따르면서 “장군님께 용무가 있어 찾아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장군께서는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시면서 “응, 그래? 들어와 봐!”하셨다.
나는 장군의 책상 앞에서 꼿꼿하게 서서 동경하던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 장래의 포부, 가정 형편으로 인한 학업중단 위기 등을 또렷하게 말씀드렸다. 장군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뜻밖에도 인자한 어조로 네 학교 성적은 어느 정도냐, 담임 선생님께는 말씀드렸냐?, 교무주임 선생과 서무주임 선생이 누구인지 아느냐? 등을 물으시고는 알았으니 그만 가보라고 하셨다. 경례를 올리고 장군의 방을 나오니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종례시간이 끝날 때, 담임인 김구동 선생님이 “이 군은 좀 남아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김 선생님은 “그런 일(학업중단)이 있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어찌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느냐! 나는 너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몰라 미안하다”면서 김 장군님께서 이 군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가 있으셨으니 호적등본과 부친의 교직자 재직증명서 등을 제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조재억 교무주임 선생님의 검토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게 됐다는 서광의 장학통지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다음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99년 5월 성남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재학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일을 써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퍼뜩 김석원 장군이 떠올랐다. 김석원 장군께서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주셔서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신 은인이다. 뿐만 아니라 “의에 살고 의에 죽자”, “병들어 죽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 죽자”라고 우리를 가르치신 분이다.
나는 그분과의 일화를 쓰고 그 옛날을 생각하며 금일봉을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동봉하였다. 성남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이 글을 널리 알려야겠다며 동창회보(1999. 6. 1 제61호)에 게재하였다.>
1학년을 마칠 무렵 신문배달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새벽 4시경 영등포 <동아일보>지국에 나가 신문을 받아들고 문래동 일대를 돌면서 배달을 마치고 자취방에 와서 아침을 먹고 등교를 하였다.
2학년이 되자 아침저녁으로 보강수업이 더욱 강화되었고 대학진로가 당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학교 수강 교과목 중 일반 사회, 국사, 국어 등 인문계 과목은 흥미도 많고 성적도 좋았는데 수학, 과학 등 이공계 과목은 흥미도 적고 학과 성적도 오르지 않았다. 당시 각군 사관학교 시험과목은 이공계열 쪽이 유리했었기 때문에 나는 일반 대학 진학 쪽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꿈은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그 명성을 들어왔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감생심, 고등학교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는지 장래가 깜깜한 나에게는 일반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사치이고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학과 공부에는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