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용기의 장학금

▲ 이종석 사장
아버지는 입학을 반대하셨지만 일단 입학하고부터는 어쩔 수 없이 학비를 지원해 주셨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가정형편상 학자금을 더는 보내 줄 수 없으니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내려오라는 편지가 왔다. 여가를 이용해 생활비 일부와 용돈 등도 겨우 충당하는 정도라 학교에 납부해야 하는 수업료와 등록금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작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관 앞 운동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이대로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할 수는 없었다. 재단 이사장인 김석원 장군을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려보기로 했다.

그때 김석원 장군은 우리 학생들에게는 교장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할아버지 선생님과도 같은 분이었을 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김석원 장군과 마주치면 부동자세로 대하던 때였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듯 부리부리한 눈, 세상이 떠나 갈듯한 목소리만 생각해도 겁이 났다. 그러나 이제 막다른 골목인데 김 장군께 사정 말씀이라도 드려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일요일 아침 비가 내렸다. 나는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로 갔다. 아침부터 본관 현관에서 정문 쪽에 있는 김석원 장군 댁을 응시하면서 장군님이 오시기만 기다렸다.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나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비는 주룩주룩 퍼붓고 있었다.

11시쯤 비가 그치는 듯 했을 때 드디어 카이젤 수염의 김석원 장군께서 망토를 걸치시고 본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장군께서 가까이 오셨을 때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 거수경례를 붙였다. 장군께서는 인사를 받으시면서 재단 이사장실 쪽으로 걸어 가셨다. 나는 장군의 뒤를 따르면서 “장군님께 용무가 있어 찾아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장군께서는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시면서 “응, 그래? 들어와 봐!”하셨다.

나는 장군의 책상 앞에서 꼿꼿하게 서서 동경하던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 장래의 포부, 가정 형편으로 인한 학업중단 위기 등을 또렷하게 말씀드렸다. 장군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뜻밖에도 인자한 어조로 네 학교 성적은 어느 정도냐, 담임 선생님께는 말씀드렸냐?, 교무주임 선생과 서무주임 선생이 누구인지 아느냐? 등을 물으시고는 알았으니 그만 가보라고 하셨다. 경례를 올리고 장군의 방을 나오니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종례시간이 끝날 때, 담임인 김구동 선생님이 “이 군은 좀 남아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김 선생님은 “그런 일(학업중단)이 있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어찌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느냐! 나는 너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몰라 미안하다”면서 김 장군님께서 이 군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가 있으셨으니 호적등본과 부친의 교직자 재직증명서 등을 제출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며칠 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조재억 교무주임 선생님의 검토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게 됐다는 서광의 장학통지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 다음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99년 5월 성남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재학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일을 써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퍼뜩 김석원 장군이 떠올랐다. 김석원 장군께서는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주셔서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신 은인이다. 뿐만 아니라 “의에 살고 의에 죽자”, “병들어 죽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 죽자”라고 우리를 가르치신 분이다.

나는 그분과의 일화를 쓰고 그 옛날을 생각하며 금일봉을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동봉하였다. 성남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이 글을 널리 알려야겠다며 동창회보(1999. 6. 1 제61호)에 게재하였다.>

1학년을 마칠 무렵 신문배달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새벽 4시경 영등포 <동아일보>지국에 나가 신문을 받아들고 문래동 일대를 돌면서 배달을 마치고 자취방에 와서 아침을 먹고 등교를 하였다.

2학년이 되자 아침저녁으로 보강수업이 더욱 강화되었고 대학진로가 당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학교 수강 교과목 중 일반 사회, 국사, 국어 등 인문계 과목은 흥미도 많고 성적도 좋았는데 수학, 과학 등 이공계 과목은 흥미도 적고 학과 성적도 오르지 않았다. 당시 각군 사관학교 시험과목은 이공계열 쪽이 유리했었기 때문에 나는 일반 대학 진학 쪽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꿈은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그 명성을 들어왔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감생심, 고등학교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는지 장래가 깜깜한 나에게는 일반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사치이고 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학과 공부에는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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