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의거와 4·19혁명

▲ 이종석 사장
1960년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되어 자유당정권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성남고 최고학년이었던(高三은 졸업하였기 때문에 高二가 최고학년) 우리는 3월 17일 수업시간 중에 「부정선거 다시하라」, 「경찰은 마산학생(김주열) 사살사건을 책임져라」, 「백만 학도여 궐기하라」는 등의 전단을 만들고 미리 제작한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자’ 플래카드를 들고 영등포 영보극장 앞에 집결, 영등포구청 로터리로 돌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긴급 출동한 경찰에 쫓겨 OB맥주 공장 쪽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공포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충돌하였다.

경찰들은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우리 학생들을 구타하였고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1백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학교장이며 학교 설립자인 김석원 장군이 영등포경찰서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위문하고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 학생시위는 서울에서 최초로 일어난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였으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4·19 학생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시위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시위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었다. 후일 학교 교정에 3·17의거 기념비가 우리 참가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세워졌다.

▲ 317의거 기념비
이후 자유당 독재정부에 대한 항거데모가 더욱 확산되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4월 19일에는 전국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고 이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 되었으며 자유당정권은 제2인자이며 부정선거의 배후로 지목되던 이기붕 일가의 자살사건과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이어 6·29선거에 의거 내각책임제의 새 헌법에 따라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어 국회에서 윤보선 대통령이 선출되고 장면내각이 구성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로서 광복 후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로부터 국부의 추앙을 받았으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철폐,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등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결국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서거하게 되었다.

1960년 10월 경희대학교에서 실시하는 전국 남녀 고교생 학력대회가 있다고 했다. 입상자에게는 경희대학교 무시험 입학자격과 장학금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성남고등학교에서 약 10명이 참가했는데 나는 일반 사회 과목으로 참가했다. 비교적 무난히 썼다고 생각했지만 전국대회니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발표하는 날 경희대학교 발표장으로 갔다. 그런데 먼저 발표를 보고 나오던 학교 친구(유정길)가 내가 2등으로 합격했다고 말하였다. 나는 농담이려니 생각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확인하였는데 전국에서 2등으로 당당히 합격되었던 것이다. 꿈만 같았다.

▲ 1960년 전국 남녀 고교생 학력대회 2등으로 입상
바로 이날 조영식 경희대학교 총장으로부터 상장과 기념메달을 받았다. 다음 날엔 성남고등학교 조례 시 전교학생이 모인 가운데서 한백호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학교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신문배달도 열심히 했다. 신문배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급우들에게 계면쩍기도 하여 그 사실을 숨겼다. 다른 학생들에게 신문배달하는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학업에만 열중했다. 성남고등학교는 나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결정하게 된 소중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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