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려대학교


드디어 대학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여 오직 경희대학교로 간다는 것은 그동안 꿈에 그리던 고려대 법대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일단 응시라도 해보고 싶었다. 결국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장으로 갔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려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시험장 시험감독 교수님(후에 알았지만 한동섭 교수)은 이 방(교실)에서 많이 합격하라고 덕담을 해 주셨다.

합격자 발표일, 수학을 제외하고는 전 과목을 무난히 썼고, 특히 일반 사회 과목은 거의 만점에 가깝게 썼다고 생각되어 은근히 기대는 해보았지만, 전국에서 수재들이 모인다는 이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명단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합격자 명단에 ‘李鍾石(이종석)’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었다. 합격이었다. 그때의 감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께 감사드렸다.

이렇게 두 대학에 합격되었으나 아직도 학교 선택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았다. 경희대학교는 입학금이 면제될 뿐 아니라 4년간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대학교는 많은 입학금을 납부해야 할 뿐 아니라 4년간의 학비를 직접 조달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걱정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던 차에 가정교사 제의가 들어왔다. 신길동에 사는 <동아일보> 독자 한 분(윤성섭 씨)이 나의 사정을 알고 성실성을 치하하면서 자기 집 가정교사를 부탁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아들(윤재운)의 과외지도를 해달라며 숙식과 약간의 용돈을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치열했던 중학교 입시를 앞둔 학생의 장래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부담은 되었지만 열심히 지도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감을 갖고 수락하였다.

나는 용기를 얻어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입학금을 납부하고 드디어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법과대학 학생이 되었다.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은 유진오 박사(대한민국 제헌헌법 기초, 후일 신민당총재)였고, 법과대학장은 이항령 교수(후일 문교차관), 학생처장은 현승종 교수(후일 국무총리), 사무처장은 차락훈 교수였다.

입학식에서 유진오 총장은 고려대학교의 설립배경과 창학 이념, 우수한 교수진과 허정(許政:내각수반), 이병도(李丙燾:교육부장관), 이철승(李哲承:국회의원) 등 배출된 수많은 졸업생들의 업적을 소개하면서 우리 신입생들도 국가의 큰 일꾼이 되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어 현승종 학생처장은 주의사항에서 “여러분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담배를 피워도 좋으나 피우되 예의를 지키며 피우라”고 했다. 이젠 나도 명실공히 성인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동기 입학생들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경기고, 서울고 등 소위 일류 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전국 유수의 남, 여 고등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지휘하에 응원연습에 참가하여 교가, 응원가, 교호 등을 익혀야 했다. 그리고 각종 경기는 물론 응원전에서도 고연전(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하여야 한다는 패기가 넘쳤다.

또 우리 법과대학 신입생 환영행사는 서오릉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 학과 학생 중에 특히 노래를 잘 부르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는 풍문여고 출신의 최순강(예명 김상희)이라고 했다. 그가 바로 후일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장이 된 가수 김상희이었다.

또 고향 서산 출신 고려대학생 모임인 고우회(高友會)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 주어 참석하게 됐는데 뜻밖에도 여기서 중학생이 되어 부러웠던 초등학교 동창 한광동(후일 한국피혁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미 화학과 복학생(復學生)이 되어 있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