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 쿠데타와 학생운동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8기생 장교들의 추종을 받은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였다. 이들은 소위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였다.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경제인들을 체포하여 구금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박정희가 의장에 취임(초기에는 장도영 중장이 취임하였다가 실세들이 후에 부의장인 박정희를 추대)하여 모든 국회권한을 대행하였다.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이 허무하게 무너진 데 대하여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막중한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있는 법과대학 학생으로서 한없이 애절하고 안타까웠다.

일체의 정치적 집회가 금지된 살벌한 군부 통치하에서 뜻을 같이한 우리 과 유지담(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겸 대법관), 정외과 김진수 등과 함께 서울대 정외과 이종순을 비롯한 타 대학 대표들과 연합하여 범민족학생단이란 학생 조직을 결성하고 창덕궁 후원(당시는 비원으로 호칭), 중앙대, 경희대, 한양대 등에서 순회회동하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하고 범민족학생단의 성안(成案)된 조직강령을 채택하고 지도부를 구성하기도 했다(당시 서울대 현승일도 참석한 일이 있었으나 의견이 달라 결별).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분이었지 학구에 매진해야 할 학생신분으로서 지속할 수 있는 현실 정치활동일 수는 없었다. 유지담은 이제는 사법시험에 매진해야겠다고 했다. 의기투합하여 함께 행동하는 동안 그는 나를 전적으로 밀어주고 신뢰하여 마음속으로 한없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결국 범민족학생단을 조직적·지속적 정치활동으로 비화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학교생활에 열중했다.

◇농촌 부흥과 공명선거운동
그런데 소위 혁명정부에서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국민 도의 재건의식을 앙양시킨다는 명목으로 대국민 홍보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우리 학생들은 선거를 앞두고 대국민 사전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63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고향 서산 출신 고려대 재학생들은 우리가 고향에 내려가 농촌이 부흥하는 길은 무엇이며 공정한 선거를 위하여 어떻게 대비하여야 하는지 등을 알려야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서산 출신 고려대 선배들의 지원을 받아 1963년 8월 7일 오전 10시 서산읍 공관을 빌리고 읍내 각 이장에게 주민 참석요청 서한을 발송하는 등 준비 후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청중동원 방안으로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상영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역시 많은 시민이 읍공관을 꽉 메웠다. 상학과 60학번 이일구 선배, 경제학과 61학번 김종대 교우 등과 함께 연단에 섰는데 나는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 방식인 비례대표제를 주제로 열정을 가지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거방법을 설명하고 부정선거를 배격하고 공명선거에 앞장서자고 호소하여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법률구조단체(Legal Aid) 설립운동
이건호 교수로부터는 형사정책(刑事政策)강의를 들었는데 강의 중 법률구조단체(Legal Aid)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형사 피의자가 경제적, 법적능력이 없어 억울한 형벌을 받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돕는 단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단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감명을 받아 몇 친구들이 모금을 하여 이 단체를 설립추진하자고 결의하고 이건호 교수님께 지도를 부탁드렸다. 며칠 후 학교에서는 그런 일은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서 능력이 생기면 할 일이지 학생신분으로서 모금할 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법률구조공단 설립계획 추진은 무산되고 말았다. 실제 법률구조단체(협회)는 그 후 9년 뒤인 1972년 6월 14일 민법 제3조에 의한 비영리재단법인으로 설립되어 법률구조협회 업무를 승계함으로서 법률구조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한일회담과 6·3운동
1963년 2년 7개월간의 군정 끝에 박정희가 대장으로 예편하여 소위 혁명공약으로 군으로 돌아간다던 약속을 어기고 민정에 참여하여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전년도(1962. 3)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민정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4년 6월 그는 공화당 당의장이던 김종필을 일본에 보내어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을 추진하였다. 이에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연세대, 서울대 등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만 5천여 명 등 총 3만 명이 거리로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당시 연일 학교수업을 전폐하고 안암동과 보문동, 신설동 등으로 진출하여 진압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그 당시 고려대학에서는 총학생회장 김재하, 법과대 학생회장 이경우,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후일 국회의원), 상과대 학생회장 이명박(후일 제17대 대통령) 등이 주도하였다.

한때 국회의사당을 점령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병력을 서울시내에 투입,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검렬, 영장 없는 압수수색, 체포, 구금, 주동자 검거 등으로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김종필 당의장은 사임하였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천 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