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과 공직자의 길②

▲ 이종석 사장
교통편은 항상 청량리에서 영주, 묵호를 거쳐 강릉까지 운행하는 특급열차를 이용하였다. 결국 우리가 안양에서 다시 만났던 날을 기하여 다시 만난 지 3년째 되는 1966년, 방학 기간이면서 휴일이기도 한 8월 15일에 결혼식을 갖자고 약속했다. 양쪽 집안의 가정 형편으로 보거나 금자가 아직 학생 신분이란 것을 생각하면 결심하기 어려웠지만 가능한 한 빨리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었다.

예식장은 종로예식장(종로2가:현 외환은행 인사동지점)으로 정하고 주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교인 고려대 법대 헌법 교수이신 한동섭(韓東燮) 교수를 모셨다. 허례허식은 모두 생략하고 진실한 마음을 담은 간단한 예단과 반지를 예물로 준비하고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나의 편지로 사주단자를 대신했다. 신부측에서도 오직 손목시계 하나를 예물로 준비했다. 신랑 양복은 윤성섭 씨가 자기 아들의 과외지도를 잘 해줘서 그 어려운 배재중학교에 합격하였다고 고맙다면서 한사코 맞춰주었다.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친지·친구들의 축복 속에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사회는 우리의 결혼을 진정으로 성원해 준 조순동 교우가 맡았다. 사회자가 “지금부터 전주 이씨 성교님과 동래 정씨 혜근님의 아들 신랑 이종석 군과 인동 장씨 창수님과 전주 이씨 정숙님의 딸 신부 장금자 양의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신랑이 입장하고 오라버니(장충남)의 안내로 면사포를 쓴 신부가 입장했다.

주례로 모신 한동섭 교수님은 유지담 교우가 모시고 왔는데 주례를 처음으로 맡으셨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신랑 신부가 하늘이 맺어준 연분으로 결혼하게 된 것을 축하하며 사랑과 존경, 인내로써 일생을 행복하게 살라는 취지의 주례사를 해 주셨다. 친구 대표로 칠우회 김우재는 역경을 딛고 결혼식을 올리는 우리의 혼례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축사를 낭독해 주었다. 신혼여행은 남산에 올랐다가 우리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안양유원지에서 일박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결혼을 하고 다음 날 묵호로 내려가는 길에 신길동에서 오징어 낚시에 쓰는 요리도리(어구 부속품)를 구입해 가지고 내려갔다. 그리고 묵호읍 진리에 마련한 월세 단칸방에서 짐을 풀었다.

서울에서 구입한 ‘요리도리’를 묵호, 삼척, 주문진에 있는 선구점에 외상으로 팔고, 내가 출근을 시작한 후 새 신부인 아내가 수금을 했다. 휴일에는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등을 돌아보며 관광했다.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깐 아내는 9월 개학에 맞춰 상경하여 서울 처가댁에서 양장점 일을 돌보며 학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해 졸업 시험을 마치고 겨울방학부터 비로소 실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아내는 퇴근하는 나를 항상 반갑게 맞아 주었고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으며 무엇이나 상의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줬다. 한 가정을 이루면서 오랜 객지생활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포근함을 아내가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어머님 제사도 이젠 우리 집에서 모실 수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紙榜)을 어려운 한자로 쓰지 않고 쉬운 한글로 쓰고, 축문(祝文)도 우리말로 풀어 읽기 쉽게 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초 인사발령으로 <인천지방해난심판위원회〉(위원장 김응순)에 전임, 근무를 시작했다.

해난심판위원회는 해난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과실 있는 해기사를 징계하는 기관으로 그 조직과 편제는 법원과 유사한 국가(교통부)기관이었다(현재 국토해양부:해양안전심판원). 전공분야 업무이기도 하고 묵호 해운국에서 습득한 해운, 선박 업무와도 밀접하여 흥미를 가지고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소속장으로부터 표창장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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