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벽돌집과 아들 삼형제 ①

▲ 이종석 사장
인천해난심판위원회로 부임하면서 인천시 부평동에 점포가 달린 단칸 월세방에 살게 되었고, 아내는 조그마한 양장점을 운영하며 살림을 도왔다. 1967년 4월 23일에는 큰아들 동구가 태어났다. 전날 늦은 밤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새벽 첫 기차로 용산철도병원(산부인과)에 입원하여 출산하였다. 이렇게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어갈 무렵 집주인이 6개월만 되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성화를 받으며 월세를 사는 것보다는 무허가 집이라도 내 집을 장만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휴일이 되면 집터를 알아보기 위해 부평 변두리, 오류동 인근과 경인선 정거장 부근을 헤맸다. 수소문 끝에 영등포구(현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로구) 온수동 노변에 조성된 집터를 1만 8000원에 구입하게 되었다. 물론 소유권이 있는 제대로 된 땅이 아니고, 도로 옆 땅 점유(관리)자한테 권리금을 주고 관리 양도를 받는 형태였다(당시에는 이런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는 이 마을 통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며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집을 짓고 이사를 오려고 하니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는 젊은 사람이 예의있게 협조를 구하는 데 감동했다며 마을 사람들을 소개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처가댁 친지로부터 자금 일부를 빌리고 벽돌, 모래, 목재 등을 건재상에서 후불 조건으로 구입하여 마사(모래) 벽돌로 방 두 칸과 마루가 딸린 집을 짓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는데 비를 맞으며 공사 일을 돕느라 허리띠에 살갗이 쓸려 짓무르는 것도 모르다가 큰 흉터가 남기도 했다.

부평 월세 보증금을 찾고 방 하나를 세주어 급한 인건비와 건재상 외상값 등을 갚고 부평에서 온수동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깐이었다. 생활의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선 식수가 없어 이웃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사용해야 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사용했다. 마을에는 공중전화도 우체통도 없었고 은행도 없었다.

출근은 도보로 약 2km 거리의 오류동역에 가거나 시외버스로 소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인천역 공원 꼭대기에 있는 해난심판위원회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경제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한정된 월급에 생활비도 모자라는 형편인데 집을 짓느라고 빌린 돈의 이자는 점점 불어 갔다.

1968년 11월에는 인천지방해운국으로 전입되었지만 생활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논의 끝에 부업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튼튼한 직장이 있다하여 주위 친지들이 믿고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

우선 전기를 가설하고 우물을 팠는데 물맛이 좋고 시원했다. 마루를 개조하여 점포를 개설하고 최초로 온수동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 ‘온수상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간단한 식료품, 과자류, 생활용품 등을 진열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물론 아내가 운영했고 나는 퇴근 후 또는 휴일을 이용해 거들었다.

마을 주민들의 숙원사항이던 공중전화를 가설하고 우표 판매소와 담배 판매소를 개설했는데, 체신부, 전매청 지인들의 적극적인 협조·지원으로 가능했다. 차츰 주민들의 이용도 늘었고 수입도 늘어갔다.

<다음호에 계속>

▲ 온수동에서의 단란한 휴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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