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벽돌집과 아들 삼형제 ②

이때까지 주변은 대부분 산과 논, 밭이었다. 그런데 앞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영등포 기계공업공단(현재는 온수공단)이었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공단 정문이(진입로) 생겼다. 이것은 큰 행운이었고, 우리 가게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집터는 용도 폐지된 철도 부지였다. 그러던 중 일부 주민들이 철도청으로부터 불하를 받아야 한다며 관계자들을 찾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분들이 나에게 불하문제에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당면한 우리 집 일이기도 하였기에 적극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1971년 5월 관할 철도청인 서울지방철도청에 찾아갔다. 상황을 설명하고 주민들의 부지매입 의사를 전달했다. 철도청에서도 용도폐지 재산으로 방치되어 있던 상태이므로 절차에 따라 매각해야 할 부지로 파악하고 우선 점유 토지에 대한 무단 사용료를 납부하라고 했다(1971. 11. 22). 우리는 철도청의 지시에 따라 토지사용료를 납부하기 시작했다(이로써 연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철도청에서는 이 토지를 매각하려면 측량 등 매각소요 예산이 책정돼야 하는데 예산이 확보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점유자들의 비용으로 측량을 하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이 회합을 갖고 철도청의 요구대로 우리의 비용으로 지적 측량을 하기로 하고 점유 부지 구분은 중간선을 기준으로 했다. 측량이 실시되고 이 결과에 따라 1972년 2월 28일 철도청과 점유 주민들과 토지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주민들이 영세민이었으므로 토지 대금은 5년 연부로 분납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집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 118-4호’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즈음 나의 군복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된 상태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병무청을 찾아갔다. 현재 보충역으로 편입되어 있고 병역을 기피한 사실이 없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자원복무를 하고 싶다면 실역 지원하여 약 2년간 방위업무를 수행하면 소집해제(제대)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주위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나는 떳떳한 국민이 되고자 실역지원을 결심했다.

1969년 9월 지역 예비군 중대를 통하여 보충역으로서 근무를 실역 지원, 소집영장을 하달 받은 후 퇴근 후에는 방위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11월 2주간의 집체교육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받는 기초 군사교육과정이었다. 2주 과정을 다 마칠 무렵 11월 17일 새벽 아내가 산기가 있었다. 나는 아내를 택시에 태워 서울 용산철도병원으로 달려갔다. 도착하자마자 분만실에서 순산하였다. 둘째 아들 창구가 태어난 것이다.

집체교육을 마치고 오류파출소로 배치 받았다. 근 2년간 근무하면서 퇴근 후 2일에 1회씩 야간 방위근무(소총을 배정받고 지정 방위초소에서 철야 근무)를 마치고(당시에는 휴직하지 않고 방위근무를 병행할 수 있었음) 1972년 5월 1일 군번 92008239번으로 소집해제(제대)증을 받게 되었다.

그해 5월 21일에는 막내 아들 준구가 태어났다. 나는 실제 생일과 호적상의 생년월일이 달라 불편을 느꼈으므로 우리 아이들은 제대로 출생신고를 하겠다는 생각에 동구, 창구에 이어 준구도 신속히 출생신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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