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를 천직으로 여기며 사신 아버지

▲ 이종석 사장
나는 인천지방해운항만청에서 부두담당 사무관으로 만 2년을 근무했다. 그 후 사업계획과 예산을 담당하는 총무과 기획담당 업무를 거쳐 항만개발과 항만부지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항무담당 사무관으로 복무했고, 1981년 5월 서울 본청 내항과 여객담당으로 발령이 났다.

사무관으로서 첫 본청 근무의 시작이었다. 전국의 여객선 항로의 조정과 낙도항로결손보상, 여객 불편사항 개선을 담당하는 업무였다. 영세한 여객선 업체들이 난립되어 항로 분쟁이 잦았다. 수지가 맞지 않는 외딴섬에는 여객선이 취항하지 않아 정부가 취항을 명령하고 그 결손을 보상하였지만, 낙도항로결손 보상업체들은 보상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아우성이었다. 또한 여객선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여객선이 취항을 거르고, 불친절하며, 여객선 시설이 불비하다는 이유로 진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부임 후 친절과 공정, 성실과 인내로 모든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그러자 민원인(주로 여객선 사업자)들도 무리한 요구는 삼가고 협조적 태도로 대해 주어 대과(大過) 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81년 8월 28일 고향 서산에서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운명하시기 약 일주일 전 서산군 음암면 성암리 선영에서 벌초를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조상님들께 배례하자고 하셔서 함께 절을 올렸던 터라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교직에 몸을 담으시고 일생을 교육에 전념하셨다. 1944년 3월 처음 교직생활을 시작하여 1980년 3월까지 수원 신풍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음암, 운신, 지곡, 모항, 파도, 오남 등의 초등학교를 두루 거쳐 평생을 아동 교육을 천직으로 삼으시며 살아오셨다.

어린이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시던 아버지는 타고난 선생님이셨다. 가족에게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고모, 삼촌들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좋아하셨다. 그래서인지 속이 좋지 않다고 하시어 약 2년 전 서울 철도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셨는데 의사가 술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금주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내려가셨다. 그러나 그 후 퇴직과 생활고를 겪으면서 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시고 약주를 계속하셨던 것이다.

생계지책으로 학습지 판매업을 경영하시다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셨는지 막내 동생(종경)을 대동하시고 바로 전날 서산 학습지 대리점을 방문, 대차관계를 깨끗이 정리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81년 8월 28일 태안군 동문리 임차주택에서 영면하시니 향년 61세였다. 생전에 제대로 섬기지 못한 불효가 한스러웠다.

▲ 아버님의 회갑연, 서울에서 친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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