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호

▲ 거문도 관백정
소운 형,

거문도(巨文島)로 왔습니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항해한 유역이 여수시 삼산면(三山面)에 속한다고 합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몇 구획 중 최남단의 구획입니다.

봄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쩌면 바다를 보러 왔습니다. 반도 중허리의 길고 메마른 삼동(三冬)에 질식할 것만 같아서, 삼월이 열리자마자 만단을 제처 두고 달려왔습니다. 32노트의 쾌속 공기부양선 ‘모비딕’의 쌍 동체가 헤쳐 내는 초록 물결에 드디어 심호흡이 터집니다. 초 삼월의 남녘 바다는 이미 완연한 봄의 초원이었습니다.

절해고도의 첫 새벽이 아슴푸레 열립니다. 남으로 빠끔히 터진 수평선 위로 여명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문득 일어나는 바람에 방파제 끝의 도등(導燈) 불빛 아래로 제법 큰 물결이 번득입니다. 안벽의 목선들도 까닭 모를 그리움이 안타까운 양 저마다 은은히 일렁입니다. 뒷산 중턱의 영국군 묘지를 돌아 섬 꼭대기에서 일출을 맞을 요량입니다.

숙소를 나서자 눈발입니다. 희끗희끗 날리기는 하지만 쌓이는 것은 없는, 이미 온기를 머금은 춘설입니다. 아마도 새벽 손풍(巽風)에 불려가는 조각 눈구름인가 합니다. 그러나 바다의 강설이 매양 그렇듯 수평으로 날아들어 얼굴을 때립니다.

문득 한 생각이 스칩니다. 눈 덮인 산골에서 호롱불을 돋운 채, 도시로의 꿈을 엮던 어린 시절 말입니다. 그때 소년은 참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대처에의 그리움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겠지요. 몇 달이나 묵어서 너덜너덜해진 ‘어린이’라는 잡지 속의 서울 아이들 이야기며, 또래 여학생들의 곱고 환한 모습은 바로 딴 세상의 신비였습니다.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바로 그 소년이 항로와 객지살이를 겪으면서 어느덧 초로(初老)를 넘어섰습니다. 삼십여 년의 판박이 서울생활이 아무래도 갑갑해서 잠시나마 이곳으로 탈영해 왔습니다. 이곳엔들 샘물 같은 안식이야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삶의 변덕인가 합니다.

영국군 묘지에 오르자 하얗게 날이 샙니다. 눈은 멎고 바다가 트여오는 언덕배기에 장다리 유채꽃이 만발입니다. 제비꽃 연보라 벨벳도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서울은 아직도 회색빛 엄동이건만, 요만한 거리에서 격지지감(隔地之感)이 새롭습니다.

두 장의 평판비석 사이에 하얀 십자가가 오뚝합니다. 당초에 아홉 묘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뿐이라 합니다. 서울의 영국대사관에서 자주 찾아와 보살핀다 합니다. 지구 반대편 절해고도의 한 점 자취까지 빠짐없이 아우르는 그들 국가의 품위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의 주권이 허둥대던 시기에 그들의 병력이 무단으로 머물렀다 떠난 치욕의 흔적입니다. 자그마한 포구를 저네들의 장군 이름인 ‘헤밀턴 항’으로 이름 짓고는 십여 척의 함선과 2000여 해군 해병을 2년이나 주둔시켰던, 시대의 얼룩입니다.

거문도라는 지명 또한 이에서 유래한다 합니다. 저들의 점유를 항의하러 왔던 청나라의 북경수사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곳 귤은(橘隱) 김류(金溜)선생의 제자들과 필담을 나누고는 ‘큰 문장가들이 사는 섬’이라는 뜻으로 조선 조정에 주청한 일이랍니다. 원래 이름은 삼도(三島)였다고 합니다. 이 또한 역사의 변덕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런지요. 이놈이 이래도 그뿐, 저놈이 저래도 그만이었던 주권과 국토의 체신이 길섶의 버들가지나 울타리의 꽃(路柳墻花)처럼 헤플 따름입니다.

남북으로 앉은 섬의 능선은 상록활엽수밀림입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숲길이 무덤에서 무덤으로 연결됩니다. 섬 유일의 공동묘지인가 합니다. 인적 없는 새벽 댓바람에 으스스 한기마저 돕니다. 그래도 정상의 전망대는 닦은 터에 콘크리트 육모 누각입니다.

섬 전체가 한 눈에 듭니다. 초승달 같은 동도(東島)와 그믐달을 닳은 서도(西島)가 마주보며 누운 채, 내가 타고 앉은 고도(古島)를 핵(核)으로 싸안았습니다. 여체의 심연(深淵)이 바로 이런 형상일 런지요. 그 틈의 물길로 이국의 함선들이 제한 없이 드나들던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워버리고만 싶은 지난날의 사연이 못내 서러운 듯, 동백꽃이 저 혼자서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집니다.

일출은 백도(白島)를 배경으로 해서 잉태되고 있습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불러 오르고 선홍빛 양수(羊水)가 흥건히 넘쳐흐르자, 금빛 태양이 머리를 내밉니다. 광대한 생명의 심연이 분출하는 우람한 출산입니다. 귤은 선생이 ‘하늘에 닿은 무인절경’이라 읊었던 상백, 하백 두 섬이 일출의 장엄아래서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납작합니다.

오후에는 서도의 수월산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도 그 산의 한문이름은 묻지 않았습니다. 어제 이곳에 도착하면서 겪었던 일이 그렇습니다. 동도, 서도는 알 만한데 고도는 한문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이 섬의 원로급 노인이 표정 없이 대답했습니다.

“조상대대 이곳에만 사는 우리는 당초의 삼도밖엔 몰라라. 거문도도 모르는데 고도가 다 뭐여?”

꼭 그런 뜻이야 아니겠지만, 사실 우리들의 한문지향 인습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나이와 출신을 먼저 챙기려는 것 같은 편협증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섬에서나마 그런 일 없이 지내 볼 작정입니다.

삼호교(三湖橋)를 넘어 서도로 들어선 합승택시가 유림해수욕장을 지납니다. 보드라운 모래펄의 은근한 해조음이 마치 여인의 된 숨소리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파정(破精)을 하게 된다고 누가 썼던 바로 그 해변입니다. 그러고 보니 넓지 않은 백사장에 에메랄드빛 봄 물결이 숨결처럼 은근하게 스밉니다.

택시의 종점이 ‘물넘이 고개’라 합니다. 보로봉의 산발치가 수월봉으로 연결되는, 마치 거대한 물고기의 등뼈처럼 하얀 화강암 길입니다. 풍랑이 심할 때면 물결이 이곳을 넘나든다 합니다. 그러자, 수월봉의 한문표기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도저히 벗어나지 못할 중독의 인습인가 합니다.

산의 들머리는 목책과 나무계단입니다. 첫 오르막을 지나면 바로 산허리를 감아 도는 산책로입니다. 후박, 생달, 황칠, 돈나무 외의 이름 모를 난대성 상록활엽수림 속에 동백이 마침 한물입니다. 낙화가 그만하기로야 단연 동백이어서, 산책길 도처에 선홍빛 융단입니다.

울창한 숲길이 훤하게 터지면서 섬 남단 중턱의 거문등대와 붉은 지붕의 부속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동양최대의 프리즘렌즈를 장착한, 한국최초의 등대로서 15초 주기의 홍백섬광(紅白閃光) 등질(燈質)이라 합니다. 배경의 청정 남해가 스텦(steppe) 지방의 풀밭처럼 시원스럽습니다. 수평선은 옅은 안개로 아슴푸레합니다.

등대 옆 깎아지른 절벽위에 육모정 하나가 허공에 뜬 듯 섰습니다. 바다너머 동쪽으로 백도를 조망하는 관백정(觀白亭)이라 합니다.

앞서 올라갔던 상백객(賞白客)들이 투덜대며 내려옵니다. 흐린 날씨 탓에 백도를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과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삼각산 백운대(白雲臺)에서 구름뿐이라고 불평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흰 구름, 빈 바다일망정 관백(觀白)에야 족하리라는 생각입니다.

▲ 한일상선 김문호 사장
반야심경을 일관하는 ‘공(空)’의 의미를 이곳의 ‘백(白)’으로 대치한들 무방하지 않을 런지요. 그래서 귤은 같은 거문(巨文)께서도 과거(科擧)길을 돌아서서 이곳에서 일생을 자적(自適)한 것일까요? 마치 당나라의 유학길을 되돌렸던 원효처럼 말입니다.

아득한 빈 바다입니다. 그러나 내겐 동쪽의 양 백, 남서의 제주, 서쪽의 여서, 그 북쪽의 청산, 생일도가 빠짐없이 보입니다. 해군의 초급장교 시절, 한 번 나서면 40여 일은 바다에서 떠돌던 출동을 여러 차례 나다닌 해역입니다.

그 틈새로 내 삶의 작은 공백(空白)도 보입니다. 아직은 채색으로 오손되지 않은 여백(餘白)입니다. 바로 그곳으로 내 젊은 시절의 초록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금년의 봄맞이가 서운하지 않습니다. 하루만 더 머물렀다 올라갈까 합니다. 그래도 못내 아쉬우면 선운사라도 들려서 기겠습니다. 그곳의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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