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 한 폭

▲ UNKRA(유엔한국재건단)의 원조자금으로 고갈산 자락에 건설된 옛 한국해양대학(1957년).
진달래가 왔다
수줍은 듯 얼굴을 살포시 내 민다

한겨울 혹한 견뎌내고
봄 안개에 실려 왔나

너는 봄이면 오는데
내 임은 아니 오신다

그때도 진달래가 피었으니, 1959년 이맘때였다. 그녀가 나에게로 왔다. 여고생티를 채 못 벗어나 앳됐다. 한란(寒蘭)처럼 청초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인양 감격했다. 캠퍼스를 안내했다. 주말이라 여기저기 삼삼오오로 망중한을 즐기던 학생들이 고함지르고 손뼉치며 야단법석이었다. 금녀(禁女)지대에 한 쌍의 연인이 거니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녀는 수줍어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수도원처럼 격리된 공간에서 모진 규율과 훈련은 대학의 자유와 낭만을 앗아갔다. 해서, 첫 만남에 그녀는 나의 우상이 됐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퇴교를 각오하고 탈영했다. 깎아지른 듯 한 고갈산을 넘으려고 두 뼘 남짓한 좁은 자갈길을 걸었다. 발을 잘 못 내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검푸른 파도가 나를 순식간에 삼켰을 것이다.

그녀와 영화를 봤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이었다. 저렇게 우리도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여 안타까웠다. 손을 꼭 쥐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비가 날아갈세라 손을 내밀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장갑에 내 손을 넣어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그녀의 가사실습 기간에 기숙사로 갔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제2송도 바다갓길을 걸었다. 잔잔한 바다가 달빛에 반사되어 비늘처럼 빤작였다. 땅 끝까지 함께 걷고 싶었다.

나는 졸업하고 서울에서 취직됐다. 그녀도 피난 학교에서 본교로 진학해 서울로 왔다. 불행이도 내가 지방으로 전출되면서 소식이 끊겼다. 서울로 돌아왔으나 각박한 세상살이에 가려져 그녀를 만나지 못 했다.

스물하고도 몇 년을 지나 1986년에 통화가 됐다.

“저~ 혹시?” 뒷말을 잇기도 전에
“아~ 어쩜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찌 내 목소린 줄?”
“꿈엔들 잊힐 리야!” 한 마디가 감동적이었다.

설레고 망설이며 만날 날을 기다렸다. 그때그대로일까? 세월이 그녀의 청순함을 할퀴고 갔으면 어쩌나?  옛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려면 차라리 만나지 말까.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다.

약속장소에 다다랐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이란 내 목소리에 얼굴을 마주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다. 잔잔한 전율이 그녀의 손에서 내 가슴으로 전달됐다. 망설임은 기우였다. 연륜이 쌓여 세련됐다. 은은한 미소는 옛날 그대로였다.

“잊은 적이 없었지” 때 늦은 속내를 덜어낸 나를 “바보!”라 했다. 나도 순진무구했던 그녀를 “더 더 바보!”라며 서로 서글프게 웃었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온지 너무 오래됐다.


새벽 석 점을 쳐도 당신은 잠을 이룰 수 없다지만
저는 몸살을 합니다.
잊은 적이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파랗게 멍들어 아파옵니다
그 고운 수채화가 퇴색되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지난 세월 지우개로 지워
우리 처음 만난
그 청순함으로 돌아가면
바닷가에서
너울너울 춤추련만

그녀는 갔으나, 그녀와 함께 그린 수채화 한 폭은 마음에 남아있다.「和와答」의 화제(畵題)가 있어 수채화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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