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 효녀 심청이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지금 생각하면 애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하나는 재수생, 또 하나는 고3인데 13년을 살던 서울 반포에서 안양으로 이사했으니! 지방에 살다가도 서울로 올라와야 할 판에... 딸은 "친구가 ‘너의 아버지 부도 맞았니?’라 물어요"라고 간접화법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다행히, 국방대학원에 입교하여 시간여유가 생겨 승용차로 애들을 아침저녁으로 실어 날랐다. 둘 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으니 망정이지, 불합격했다면 자식들의 원망을 평생 들을 뻔했다. 안양에서 13년을 살면서 애들이 졸업하고 결혼도 했으니 이런 축복이 또 있을까?

가까워서, 성라자로마을 미사에 자주 참여하며 나환우들과 친교를 맺었다. 나환우에 대한 이경제 원장신부님의 열정적인 사랑과 희생을 보면서 내 세상살이가 많이 변해갔다. 신부님과의 만남은 크나 큰 행운이었다.

"엘리사벳! 오르간 반주가 없어 미사하기가 너무 힘들어. 내 좀 도와 줘"란 신부님의 간절한 부탁을 딸이 뿌리치지 못 했다. 대학에 막 입학하여 '내 세상'이란 듯 신촌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피아노 레슨을 해서 용돈도 벌어야 하는데도 7년을 봉사했다.

'우리 딸, 참 기특하네. 복 많이 받을 거다'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신부님은 외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딸에게 선물을 사다주셨다. 결혼주례도 해 주셨고... 신부님은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엘리사벳의 행복을 빌어주실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나환우를 위한 봉사였으니 하느님께서도 기억해주시리라.

은퇴할 즈음 수원으로 이사했다. 연고도 없는 곳이다.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산촌이라 고적했다. 이곳이 내 인생극장의 마지막 무대라 생각했다. 해서, 내 장례미사를 해 줄 성당을 신축하고 있어 내 정성을 바치기도 했다.

공직생활을 하며 보고 듣고 체험했던 것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료를 모으고 비교하고, 사람을 만나 경험을 나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컴퓨터와 씨름했다. 풀리지 않던 대목이 연상되면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컴퓨터 자판을 이리 저리 두드리다 보면 창문이 훤하게 밝아오기도 했다.

이렇듯 한 발자국씩, 벽돌 한 장씩을 쌓아올려 책 네 권을 출간했다. 내 호를 경해(耕海)라고 자작했다. 농부가 논밭을 가는 심정으로 나도 바다를 간다는 각오로... 대학 때부터 해운과 인연을 맺어 은퇴하고도 해운에 대한 애정과 애착을 버리지 못해서다. 그 기간이 무려 쉰다섯 해다. 해운역사 속으로 들어가 뒤집어보고 꿰매보고 다듬이질도, 다리미질도 했다. 그렇게 수원에서도 13년을 살았다.

딸이 내가 그처럼 옹골지게 살던 수원을 두고 서울로 돌아오라 했다. "나는 수원이 좋아. 분양받은 아파트에 너희들이 들어가야지"라고 거절했다. 재수생과 고3을 대리고 안양으로 들어갔던 나와는 달리, 딸의 애들은 고1과 초교2인데도 교육 때문에 이웃동네로도 이사를 못 간단다. 내가 그때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였는지, 아니면 세상이 딸을 그렇게 민감하게 만들었는지!

사위가 정중하게 "저희들이 불편합니다. 처남이 미국에 있어 저희들이 돌봐드려야 하는데 멀리 계셔서 그렇지를 못해서입니다. 서울로 오세요"란다. 사위 말을 듣고는 16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군(軍)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한신 장군께서 관악산으로 올라가시다가 "딸이 가까이 오라고 하는데 어쩌면 좋지?"라고 물으셨다. 가끔 심중에 있는 말씀을 하셔서 나도 솔직하게 "한 분이 먼저 세상 떠나시면 혼자서 어쩌시려고요"란 내 대답에 "그래야 되겠군"하고는 곧 이사하셨다. 그리고 1년 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기상(氣像)이 얼음장처럼 냉철하셨던 한신 장군께서도 노약해져 자식 뜻을 따르는데 나 같은 초부(樵夫)야!'하고는 나도 사위 뜻을 따르기로 했다.

딸이 집을 씻고 닦고는 때 묻은 살림을 마구 정리했다. 그러고도 구석구석을 뒤져 퀴퀴한 것들을 다 내다버려 분위기가 산듯해졌다. 아내가 "내 살림을 왜 네 마음대로 버려"라며 모녀가 티격태격했다. 나는 옆에서 싱긋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며느리는 시댁 살림살이를 저렇게 과감하게 버리지 못 할 거야. 딸과 며느리가 다른 점이 바로 저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예전엔 그렇지 않는데, 노약해진 부모가 가련하게 보였음인지 발 벗고 나서 챙겼다. "우리 딸, 효녀 심청이네"란 한마디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내가 서울을 떠났던 26년 전에는 서울과 지방의 집값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금은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서울로 돌아오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단다. 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서울 입성'을 축하해준다.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시는 한신 장군께서도 참배하는 나에게 "사위가 서울로 오라 했다며? 잘 왔어. 자주 만날 수 있어 좋군"하며 빙긋이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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