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눈을 감는 사람들

▲ 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소련정부와 국제해사안전기구(IMO)가 해사안전에 관한 세미나를 흑해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공동으로 개최했다. 1983년 9월 2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소련과 미수교국일뿐더러 적성국이었다.

회의장에는 참가 국가들의 국기가 게양됐다. 태극기가 없었다. 문서담당 다이아나에게 물었더니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소련 해운성 샤베리에프 국장에게 물었다. IMO에서 보내온 국기를 그대로 게양했을 뿐이다 란 대답이었다.

입국 검사대를 통과할 때 나를 괴롭히던 소련 정보기관이 태극기를 제쳐두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샤베리에프에게 “소련정부의 입국허가를 받아 회의에 참가했는데 유일하게 한국 국기만 게양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말하고는 태극기 게양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다음날 태극기가 게양됐다. 샤베리에프가 흑해해운회사 소속 선박들을 뒤져 한국국기를 찾아냈으나 다른 국기들과 규격도 맞지도 않고 훼손되어 유감이라고 했다. 규격과 훼손은 안중에 없고 ‘소련에 태극기가 게양됐다!’라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 내가 그렇도록 태극기를 갈망하고 반겼던지!

세미나는 전반 1주일은 육상에서 이론을, 후반 1주일은 크루즈선 카자흐스탄에서 실습으로 짜여졌다. 낮엔 상륙하여 처칠∙루즈벨트∙스탈린 3상이 회담을 했던 얄타, 2014년에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소치, 원유수출 항구 노보로시스크 등 흑해의 항구들을 관광했다. 밤엔 카자호스탄호에서 매혹적인 미녀들이 서빙하는 호화판 만찬을 즐겼다. 유서 깊은 러시아 음악과 무용 공연도 관람했다. 소련의 예술문화가 서방세계에 비해 월등하다는 과시였다.

마지막으로, 세미나를 정리하는 평가회의가 있었다. 소련출신 IMO안전국장 코스티레프가 나에게 평가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밤을 새워 준비했다. 한국 해운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는 “한국과 소련이 이웃나라임으로 선린우호관계가 이루어지면 양국의 해운이 크게 발전되리라 기대합니다”라고 끝맺었다.

문서담당 다이아나가 “소련과 남한이 어떻게 이웃이냐?”고 힐난했다. “소련과 한국은 두만강을 경계로 이웃나라다”란 내 답변에 “그것은 북한이다” “남한과 북한은 민족과 언어가 동일한 한 나라다” “민족과 언어를 말하지 말라. 소련은 여러 민족과 언어가 있지만 한 나라다. 반면, 스페인종족이고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가 남미에는 여러 나라가 있다.”

초점을 바꾸어 “남한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무언데? 한국엔 언론, 종교, 주거이전 자유가 있다. 북한에 그런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란 나의 반문에 그녀는 답변을 피했다. 또 반격했다. “남한은 가난하다.” “한국이 북한 보다 잘 산다” “거짓말” “당신은 런던에서 근무하면서 국제기구가 발표하는 통계도 보지 못했나?” “미국 원조로 잘 살겠지” 이처럼 엄연한 사실에 눈을 감았다. 카자흐스탄호는 가시 돋친 설전을 못들은 척 호수처럼 잔잔한 흑해를 숨 가쁘게 항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문서를 친절하게 챙겨주었다. 식사 때나 관광을 할 때도 내 곁에 이었다. 호의인줄 알았는데 감시였다. 눈알이 뻔득이는 한 녀석이 회의참가자들을 뒤따라 다니며 감시했다. 내 방의 사물(私物)을 뒤진 흔적도 있었다. KGB 요원이었다. 지나치게 자유와 인권을 통제했던 소련은 붕괴됐다.

다이아나는 런던에서 3년간 근무했다. 서방세계의 자유와 인권을 체험하고도 진실에는 눈을 감고 사실을 왜곡했다. 폐쇄된 사회에서 주체사상을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온 북한여성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4년이 흘렀다.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트에서 서울로 비행하던 KAL기가 폭파됐다. 탑승자 115명이 몰살했다.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이 건설노동자들을 참살했다. 이를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이라고 한다.

김현희는 처음에 “나는 통일혁명가다. KAL기 폭파는 범죄가 아니고 혁명과업 수행이다.”라 했다. 이성이 마비됐다. 그러다 재판과정에서 유족들을 만나보고는 자신이 살인범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허나, 정의사회구현사제단이 김현희 KAL사건은 정부의 조작이란 발표에 김현희는 분노했다.

사실을 왜곡했던 다이아나처럼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진실에 눈과 귀를 막고는 비방하고 반대하고 투쟁하는 것만 정의인양 웨치고 있다.

다이아나가 한국을 앙칼지게 비방하던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하여 KAL기 탑승자 269명이 몰살됐다.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는 “지상 관제소에서 등(燈)이 깜빡거리느

냐고 물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관제소에서 등이 깜빡거려 민항기임을 확인하고도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그 명령대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고백했다. 소련과 북한은 해충을 박멸하듯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러놓고도 반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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