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

▲ 耕海 김종길
김상진 선배님이 지난 10월 18일 우리 곁을 영영 떠나셨다.

위암수술 건의를 마다하고 운명에 순응하셨다. 영안실은 번거롭지 않고 경건했다. 생전 모습대로.

1926년 4월 27일 거제도 사등면에서 태어나 가뭄이 들면 천수답이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지고 샘물이 말라 마실 물을 찾아 애태우며 아동기를 보냈기에 소외된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 3학년 때 해방이 됐다. 일본인 교수와 학생이 전원 일본으로 돌아가 텅 빈 학교를 지키셨다. 해양대학으로 재개돼 1기로 졸업하고 해군에 복무하다 1956년 해무청에서 해운행정에 첫발을 내딛으셨다.

해운행정의 꽃이었던 해사과장 재직 중, 16세기 이후 해운진흥에 주력한 국가들이 세계열강이 되었다고 역설하시어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선박확충 재원이 확보됐다. 이 기간 10만 톤에서 30만 톤으로 확충되었고 해운국장 재임 중에는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을 추진해 183만톤을 확보해 해운입국의 기반을 다지셨다.

내·외항해운, 선원·선박, 항만, 항로표지 등 25년간 해운행정을 두루 섭렵한 유일한 전통해운관료로서 부산해운항만청장을 끝으로 퇴임하셨다. 멸사봉공, 청렴결백, 공사분별의 삶을 살아 후배 공무원들의 귀감이 되셨다.

필자가 부산에 출장 중에 선배님과 동기동창인 분의 호의를 사양했다. 이분이 김해공항으로 달려와 “어쩌면 상진이와 그렇게도 꼭 닮았소!”라며 원망하기에 “저는 그 어른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멀었습니다”라 답했다.

1980년 KR회장으로 취임하여 새 포도주를 담을 서초동 독립청사를 신축하셨다. 국제선급연합회(IACS)의 준회원에서 정회원으로 승격키 위해 IMO와 IACS의 각종회의에 임직원을 참가시켜 선진정보와 기술을 습득토록 했다.

재임 6년은 특유한 뚝심으로 밀어붙여 IACS정회원을 앞당기고 KR이 국제적 선급으로 초석을 놓은 역동적인 기간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신축청사 부지를 비싸게 매입했다는 고발이 있어 검찰에서 매도자를 심문했는데 “땅을 싸게 팔아 억울한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땅을 물려받게 해 주세요”라 호소했단다.

해운발전을 위해 평생 남다른 애정과 애착을 갖고 사시느라 고달프셨는데,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향땅에서 영면하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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