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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담당한 선박도입의 막중한 업무62년말 나는 본사 기획실 ‘선박도입반’ 계장으로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동기들 중에는 김영선씨(前 범양상선 전무)와 내가 제일 먼저 계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부산지사 관리실 근무는 6개월 정도로 짧게 끝났다.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선박을 새로 건조하거나 도입하고 매각하는 업무로, 회사의 명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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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1.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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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송출, 선원수첩 승선제도 만들어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실업문제였다. 선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선원자격증이 있어도 탈 수 있는 배는 몇 척 없었기 때문에 승선하는 문제로 선사와 선원간, 선원과 선원간에 마찰이 자주 발생했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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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0.3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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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10대 1의 경쟁을 뚫고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다는 얘기를 앞서 쓴 책에서 밝혔지만 당시에 내가 대한해운공사에 들어가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연도 있었다. 그 당시 신입사원을 원래 10명을 뽑기로 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10번째로 합격시켜야 할 사람들의 점수가 3명이 똑같았다. 이로 인해 예비 합격자 명단에는 12명이 합격자로 올라왔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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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0.2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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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정치학과 출신들은 한국은행에 많이 갔고, 기자 시험도 많이 봤다. 나도 정치학과 졸업을 앞두고 한국은행을 가고 싶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다닐만한 좋은 직장이라는 것이 몇 군데 없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행은 월급도 많이 주고 모두들 알아주는 좋은 직장,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직장이었다. 그래서 나도 한국은행 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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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0.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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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등학교 때 이과 반을 택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위인들의 전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곤 했다. 전기를 읽으면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것처럼 흥분하게 되었고, 내가 못 살아본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것 같은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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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0.1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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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알 수가 없는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다. 조금 있자 화장실 양쪽에서 동시에 화장실 문을 탁탁 열어 제치며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제 꼼짝없이 죽는 구나”하고 극도의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 확인 작업은 내가 앉아 있는 칸 바로 옆에서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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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10.0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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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했던 어린 시절, 생사의 고비 넘다① 누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정확히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서울서 자랐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고향은 경남 함양인데 교사 일을 하시느라 여러 지방으로 많이 이사를 다니셨기 때문에 그 자식들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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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09.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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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영업에서의 리베이트 근절, 그리고 선원들의 밀수 근절을 회사 설립 초기부터 소신껏 밀어붙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봐서 사실 나도 여러 가지 걱정이 없는 바는 아니었다. 직원들도 너무 빡빡하게 굴면 혹시 회사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불안해하기까지 했다. 원리원칙만 내세우는데 누가 화물을 주겠나 하는 의심을 사실은 나도 조금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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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09.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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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경영이 해운불황 극복의 힘”해운경기는 2008년 이후 10년의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완전한 회복세는 보이지 못하고 있다. 부정기선 시황이 일부 회복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정기선 부문을 포함하여 해운의 각 분야가 장기적인 침체 상황에서 더욱 선명한 양극화 현상을 보임으로써 한국의 해운산업은 전체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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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운신문
2018.09.06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