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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 태조대왕의 넷째 아드님인 회안대군(懷安大君)의 자손이다. 그런데 족보가 한문으로만 기록되어 한자를 깊이 수학하지 못하는 요즈음은 후손들이 조상의 빛나는 업적과 친족관계를 알기 어렵다. 더구나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이를 알려줄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나는 회안대군의 17대손으로서 대군의 둘째 아드님인 창령군(昌寧君)의 후손이고 우리 창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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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3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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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해운항만청 감사담당관실에 근무할 때였다. 소속기관인 여수지방해운항만청과 항로표지기지창에 출장을 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경길에 오르기 전이었다. 여수에 거주하는 대학동기 소식이 궁금하여 현지 직원들에게 수소문하였더니 뜻밖에도 그는 민주화 추진협의회 여수지역 책임자가 되어 강력한 대정부 항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궁금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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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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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천지방해운항만청*에서 부두담당 사무관으로 만 2년을 근무했다. 그 후 사업계획과 예산을 담당하는 총무과 기획담당 업무를 거쳐 항만개발과 항만부지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항무담당 사무관으로 복무했고, 1981년 5월 서울 본청 내항과 여객담당으로 발령이 났다.사무관으로서 첫 본청 근무의 시작이었다. 전국의 여객선 항로의 조정과 낙도항로결손보상, 여객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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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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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 마을 온수동에는 금융기관이 없어 예금, 적금, 송금 등을 위해서는 약 2km 거리의 오류동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변두리에 인구도 얼마 안되는 낙후지역에 금융기관이 들어오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마침 전국 방방곡곡에 대대적인 새마을운동이 벌어졌다. 근면, 자조, 협동을 기치로 주민 소득증대와 주민 자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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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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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Brussels)은 외관상 프랑스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4시까지로 이 시간이 지나면 식당 문을 닫았다. 그러나 2시간 동안은 쉴 새 없이 서비스를 했다. 식당에서 달러로(us$) 식대를 지불했더니 “only belgium money”라고 하면서 벨기에 돈으로 내라고 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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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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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일의 연속이었다. 다음 해인 1978년 1월 30일에 선진국 갑문운영 및 유지보수 기술 습득을 위해 유럽 출장을 가게 되었다.소속기관인 인천항 갑문관리소 기계기사 2명 및 인천항 갑문운영 용역회사인 동아건설 직원 등과 함께 프랑스 덩케르크(DunKerque)항, 르 아브르(Le havre)항 등을 방문하고 그들 선진 항만의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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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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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생활을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아 순조롭게 승진하여 왔다. 서기보(5급을)에서 서기(5급갑)에 이어 주사보(4급을)에서 주사(4급갑)에 이르렀다.일반 행정직의 경우 승진은 자리(T.O.)가 있고 승진 연한에 달하면 승진이 가능하였으나 4급갑에서 3급(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할 경우에는 반드시 승진시험을 거쳐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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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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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교통부 감사관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하루는 한국전력공사 직원이 찾아와 고압전력선이 우리 집 지붕 위로 건너갈 예정이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우리 집 약 100m 옆 밭에 청와대 백(줄)이 있는 사람이 주물공장 건물을 신축했는데 그 공장에 들어가는 고압전력선 설치 공사를 추진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압전선이 지붕 위로 지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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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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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주변은 대부분 산과 논, 밭이었다. 그런데 앞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영등포 기계공업공단(현재는 온수공단)이었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공단 정문이(진입로) 생겼다. 이것은 큰 행운이었고, 우리 가게가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집터는 용도 폐지된 철도 부지였다. 그러던 중 일부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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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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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해난심판위원회로 부임하면서 인천시 부평동에 점포가 달린 단칸 월세방에 살게 되었고, 아내는 조그마한 양장점을 운영하며 살림을 도왔다. 1967년 4월 23일에는 큰아들 동구가 태어났다. 전날 늦은 밤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새벽 첫 기차로 용산철도병원(산부인과)에 입원하여 출산하였다. 이렇게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어갈 무렵 집주인이 6개월만 되면 집세를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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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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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은 항상 청량리에서 영주, 묵호를 거쳐 강릉까지 운행하는 특급열차를 이용하였다. 결국 우리가 안양에서 다시 만났던 날을 기하여 다시 만난 지 3년째 되는 1966년, 방학 기간이면서 휴일이기도 한 8월 15일에 결혼식을 갖자고 약속했다. 양쪽 집안의 가정 형편으로 보거나 금자가 아직 학생 신분이란 것을 생각하면 결심하기 어려웠지만 가능한 한 빨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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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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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 등으로 어수선했던 대학 졸업반 생활도 끝나가고 있었지만 딱히 나의 진로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취직을 하든가 군대를 가든가 해야 하는데 당시 취직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병역을 필해야 했기 때문에 병역 미필상태에서는 취직시험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할 계획으로 병무청에 문의해보니 군 입대 지원을 한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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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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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3학년 때였다. 방학 기간 중 특별 과외지도를 해달라는 학부모의 부탁을 받아 초등학교 학생 3명에게 과외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8월 15일이었는데 아이들이 국경일(휴일)이니 오전 공부만 하고 안양 풀장으로 놀러가자고 하였다. 마침 방문 중이던 고등학교 동창 김우재(후일 인도네시아 무궁화유통 그룹 회장)와 모두 함께 가기로 하고 영등포역에서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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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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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8기생 장교들의 추종을 받은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였다. 이들은 소위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였다. 수많은 정치인, 언론인, 경제인들을 체포하여 구금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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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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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이 시작되고 가정교사를 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정교사로 숙식은 해결되었으나 매학기마다 납부해야 하는 등록금은 역시 큰 부담이었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원조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서산 지곡초등학교 교사로 계실 때였다. 아버지를 찾아뵙고 등록금을 부탁드렸으나 박봉에 모아둔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여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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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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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학 선택의 날이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여 오직 경희대학교로 간다는 것은 그동안 꿈에 그리던 고려대 법대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일단 응시라도 해보고 싶었다. 결국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장으로 갔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려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시험장 시험감독 교수님(후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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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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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되어 자유당정권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성남고 최고학년이었던(高三은 졸업하였기 때문에 高二가 최고학년) 우리는 3월 17일 수업시간 중에 「부정선거 다시하라」, 「경찰은 마산학생(김주열) 사살사건을 책임져라」, 「백만 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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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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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입학을 반대하셨지만 일단 입학하고부터는 어쩔 수 없이 학비를 지원해 주셨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가정형편상 학자금을 더는 보내 줄 수 없으니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내려오라는 편지가 왔다. 여가를 이용해 생활비 일부와 용돈 등도 겨우 충당하는 정도라 학교에 납부해야 하는 수업료와 등록금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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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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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었던 고교 합격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나와 중학교를 함께 졸업한 막내 삼촌을 불러 앉히시고 가정형편을 말씀하시면서 우리 두 사람 모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이때는 아버지가 재혼하시고, 향렬, 종신, 종경 세 동생이 태어나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가정형편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등록금을 달라고 떼를 쓸 수 없어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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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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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취직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고향 서산에 있는 서령중학교로 전학하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서울에서 다시 시골 학교로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학생활이 너무나 힘겨웠고 신문배달만으로는 수입이 적어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서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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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7 14:13